숲 한 모금, 쉼 한 조각_1일 차
익숙한 숲길로 들어서니 달큰한 향이 난다.
단내가 어디서 나지? 달큰한 냄새를 찾으러 시선을 위로 고정시킨다. 나무 열매인가, 가을 나무 껍데기인가. 길쭉하고 유연한 가지 하나를 휘어 나무 열매를 코 끝에 갔다 댄다. 보라색으로 반질하게 생긴 것이 아무 향이 나지 않는다. 향으로 탐색할 수 없으면 그다음엔 입이다. 작은 열매 하나를 따서 맛보고는 쓰고 비린 맛에 미간을 찌푸린다. 이 열매는 아니었네.
근처에 향 나는 식물이 많은가 보지? 위를 향하던 시선을 아래로 고정해본다. 숲 한 켠, 일부러 사람을 위해 낸 자리에는 쑥이 없다. 쑥은 동네 뒷산만 가도 가득한데. 하긴, 쑥은 조금만 뭉쳐있어 나 여깄소 하고 향을 내니 모를 리가 없다.
그럼 대체 이 단내는 어디서 나는 거야?
지면에 코를 킁킁대고 나서야 저 먼 바닥에 깔려있는 낙엽이 보인다. 납작하고 축축하게 쌓인 낙엽들. 아직은 꼬부라지지 않고 축축한 채 무질서하게 쌓인 낙엽들. 아래층부터 썩어가고 있을 테지만 새로 덮인 낙엽 덕분에 부식되는 모양새를 들키지 않고 들큰하게 향을 내는 썩은 낙엽들이다. 너였구나. 붙어있을 때는 색으로 뽐을 내더니 떨어져서도 향으로 존재를 알리는구나. 죽는 순간까지 제 존재를 알리는 생명은 썩는 향도 아름답다.
엄마는 우리 집에 오시면 수건에 코를 박고 연신 킁킁댄다.
"수건에서 이게 무슨 냄새니?"
여기저기 걸려있는 수건을 한 보따리 싸안은 엄마는 세탁기로 직행한다. 엄마의 후각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수건들은 락스 물에 담가진다. 나는 "그 정도는 괜찮아...."라고 작게 말하곤 그 뒷말들을 삼킨다. '그래서 바깥 의자에 걸어놓은 거라고 바짝 마르라고, 나도 다 생각이 있다고, 락스 물에는 제발 담지마 예쁜 수건에 얼룩지잖아...' 뱉는 즉시 복잡한 상황을 만들게 될 말은 거르고 점잖게 전문가 행세를 한다.
"엄마, 인간이 쓸 수 있는 감각이 후각만 있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말해 놓고 너 역시 후각만 쓰고 있구나.
그러네, 재밌네. 후각만! 쓰고 있다기보다는, 후각을 가장 먼저 쓰고 있다는 게 맞겠지. 가을의 숲에 들어섰음을 가장 빠르게 알린 건 들큰한 향기를 낚아챈 후각과 후각을 통해 들어온 정보이다. 그러니까 감각이란 인간이 세상을 알아가기 위해 제 몸을 도구로 사용해서 얻는 방법이고 그렇게 얻은 정보들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보고, 피부로 만지는 감각적 행위를 통해 인간은 주변의 세상을 탐색한다. 나에게 가을 숲이란 후각부터 열리는 세상이구나. 낙엽 단내, 단풍나무 수액의 달콤함, 젖은 열매들의 정체 모를 비릿함, 선선한 바람에 버무려진 들큰함을 들이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내 영혼에 가을 숲이 열린다.
시각, 후각, 청각, 미각, 촉각의 오감이 이루는 향연을 우리는 즐거움이라 부른다. 숲은 내가 찾지 않아도 오감을 즐겁게 만들어 줄 요소들이 가득한 곳이다. 나무와 나뭇잎, 나무를 서식지 삼아 사는 작은 벌레들, 열매를 먹고사는 작은 동물들, 작은 동물을 먹고사는 큰 동물들, 사체를 자연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미생물들, 미생물의 서식지인 흙과 물. 어느 존재 하나 내가 잘 아는 게 없고, 어느 존재 하나 익숙한 게 없다. 여긴 그들의 세계이다. 나는 지금 그들의 세계 한가운데 이방인으로 서 있다.
아까 낙엽이 무질서하게 쌓여있다고 했잖아. 네가 생각하는 질서와 무질서가 무엇인지 궁금해. 쌓여있는 낙엽을 보고 어느 틈에 <질서와 무질서>의 평가까지 하게 된 거야?
감각이 감각에만 머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보는 게 보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세상의 모든 혐오가 사라질 거야. 혐오가 근본인 마음의 병들도. 아까 난 분명 낙엽의 냄새를 맡으며 동시에 낙엽을 보았어. 순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지. 축축한 낙엽들은 저마다 세월을 품어 낸 검버섯 자국이 있어. 난 검버섯이 생길까 봐 매일 아침 선크림을 바르고, 자기 전엔 그 선크림을 지워내기 위해 클렌징을 해. 검버섯을 싫어하고 더 솔직하게는 그게 나에게 올까 봐 무서워하지.
낙엽이 떨어진 모양새를 다시 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숲은 철저하게 인간이 갈 수 있는 경계를 정해 놓았다. 경계를 엄포하는 듯 단단한 줄이 나와 내가 관찰하기로 한 큰 나무 사이를 구분 짓는다. 다가가고 싶으나 다가가지 못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큰 나무는 우아하고, 10미터 남짓에서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려고 목을 빼고 있는 나는 겸손하다. 딱 이 정도의 거리, 딱 이 정도의 태도의 차이가 숲에서 내가 나무와 공존하는 방법이구나.
내가 보고 있는 시간 중 떨어진 잎은 단 다섯 장이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다. 떨어지는 잎새는 전경이 돼서 배경으로 깔려 있는 낙엽들 사이에 비슷하게 눕는다. 어떤 낙엽과는 왼편으로 1/2이 곂치고, 어떤 낙엽과는 오른편으로 가장자리 1mm 정도만 겹친다. 다섯 장 중 먼저 떨어진 잎과 접점이 없는 경우는 당연히 없었다. 잎이 떨어지는 중 강풍이 불었다면 멀리 날아갔겠지, 그러나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다. 아직 완연히 가을이 오지 않아서인지 떨어지는 잎들도 초록이 남아있다. 검버섯이 생기는 건 떨어진 다음인가 보다. 내 손바닥만 한 타원형의 잎을 내는 이 나무 이름은 무엇일까? 갑자기 무지가 부끄럽다. 이름도 모르고 특성도 모르는 채 마주 보고 있다니. 허리를 굽혀 시선을 바닥에 깔아보니 낙엽이 쌓여있는 단면은 딱 파이 모양새다. 운이 좋아 동네 빵 집의 빵 나오는 시간을 맞추면 따뜻한 파이를 먹을 수 있다. 적당한 갈색으로 구워 나온 애플파이, 어느 층은 엉성하고 어느 층은 촘촘하지만 한 레이어도 파이지를 벗어나지 않는 애플파이와 낙엽 쌓인 모양새가 닮아있다.
정정할게, 낙엽은 그냥 쌓여있어. 낙엽은 그냥 쌓여있고, 나는 보는 즉시 내가 알고 있는 선지식에 들어가 평가를 하지. 냄새가 들어오는 즉시 과거의 경험에서 동일한 냄새를 추적해내기도 해. 그냥 쓱 보고 무질서하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도, 관찰 후에 애플파이를 떠 올리며 연관 없는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도, 다 내가 하는 거야. 나무와는 무관한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감각이 예민한 지각으로만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호불호를 결정하기 전에, 연관성을 떠올리기 전에, 그저 머물러만 있을 수 있다면. 보이는 것들, 들어오는 냄새, 들리는 소리, 세상의 맛과 접촉이 오로지 내면에 머물러 즐거움의 향연을 만들 수 있다면, 인생이 잔치라는 말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
큰 나무는 말없이 우아하고, 10미터 남짓 떨어진 곳에서 나는 평가를 줄여보겠다고 온갖 말을 혼자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