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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선미 Dec 26. 2021

숲 한 모금, 쉼 한 조각_4일 차  


그 여름이 끝나갈 무렵 

뭉툭한 가지들에서 새잎이 돋아났어.

철이 아니었지, 그래. 

하지만 나무들은 멈출 수 없었지. 그들은

전신주처럼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 그리고 잎이 난 다음엔

꽃이 폈어. 어떤 것들에겐

철이 아닌 때가 없지. 

나도 그렇게 되기를 꿈꾸고 있어. 

For some things 

there are no wrong seasons.

Which is that I dream of for me. 


(Mary Oliver, Hurricane) 



내가 오늘 이 길을 걸을 때 

이 시를 몰랐으면 지금 내 몸을 가득 채운 전율을 느낄 수 없었겠지. 


사람의 모든 일엔 때가 있다. 지금 나는 휴식기를 보내고 있다. 나를 맞아 주는 이 산도 휴식기를 보내고 있다. 혹독한 추위를 버티기 위해 나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절수 모드를 취한다. 먼저는 열매를 떨궈내고, 색을 떨궈내고, 급기야는 잎을 떨궈낸다. 그래도 붙어 있는 잎에서는 수분을 떨궈낸다. 바짝 마른 채 숨만 쉬는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이 생존에 가장 유리하다는 지혜를 나무는 본능으로 알고 있다.      

길을 걷는데 횡으로 난 가지가 가는 길을 막는다. 발아래도 바스락거리고 눈높이에도 바스락거리는 온통 마른 풍경이다. 말라 꼬부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곱다. 장미꽃 한 다발을 선물 받으면 오래 보고 싶은 마음에 나중에는 거꾸로 걸어 바짝 말리지 않는가. 공중에 모로 누워있는 마른 낙엽이 얼핏 마른 장미 모양을 닮았다. 고운 자태를 훼손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고개를 한껏 숙이고 가던 길을 마저 걷는다.         


지혜롭게 마른 잎 


때: 물리적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사건의 시간을 나타내는 카이로스를 나타내는 순우리말. 글로 적어도, 말로 해도 낭만적인 말. 


메리 올리버의 season에 '때'를 입혀 준 번역가의 센스가 고맙다.

For some things, there are no wrong seasons. 이 구절을 처음 봤을 때 고작 여덟 단어가 모여 만들어 낸 메시지에 잠시 얼떨떨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쌓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이형기 시인의 <낙화>를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접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세상에는 '딱 그때'가 있는데, 때라는 것이 어떨 때는 타이밍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기회이기도 하며, 어떨 때는 일련의 시기이기도 하다. 겨울 숲에게 지금은 날씨의 흐름과 자기의 컨디션을 맞추어 에너지를 조절하고, 조절한 상태를 서너 달 유지해야 하는 때이다. 



그런데 재밌지 않아? 두 시인은 때를 다르게 쓰고 있네. <지금은 가야 할 때>의 때가 자발적인 순응의 아름다움을 나타낸다면, <there are no wrong seasons>의 때는 자율적 의지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잖아. 너의 지금은 어디에 가까운 것 같아? 


산책을 하면서도 내면의 목소리를 막을 도리가 없다. 한 시즌을 마무리하고 다음 시즌으로 가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쉼과 재충전의 시기이다. 나 역시 쉼과 재충전의 때를 보내고 있다.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으며 전공책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나를 발견하고 있다. 나는 비싸고 두꺼운 전공책에 나오는 지식을 순수히 사랑한 적이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지식은 짧지만 강렬한 은유를 담고 있고 이야기를 입고 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은유의 지식인들이 미묘하게 차용한 단어를 알아차리고 해석하는 데 능한 아이였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물컹했지만, 물컹한 나를 새삼스럽게 조우하는 때를 지나고 있어. <지금은 가야 할 때>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했던 시기에서 <there are no wrong seasons>의 아름다움을 깨달아가는 때를 지나고도 있지. 



지금 곱씹고 있는 물컹한 사색은 사실은 겨울 숲에서 이끼를 보면서부터 시작됐다. 갈색으로 모든 게 바스락거리는 숲길에 갑자기 새파란 이끼가 나타났다. 주변을 살펴보니 이끼가 자라는 딱 그곳만 축축한 땅이었다. 이끼는 좀 이상하다. 식물은 식물인데 하나의 개체라고 부를 수 있는 단위가 없다. 꽃도 한 송이가 있고 나무도 한 그루가 있는데 이끼는 한 개가 없다. 나와 너의 개체 간 구분도 모호하지만, 개체 안에서의 구분도 모호하다. 곤충은 머리/가슴/배의 구분이 있고, 식물은 뿌리/줄기/잎의 구분이 있는데 이끼는 뭉텅이 지어져서 대충 여기부터는 초록색이고 여기부터는 흙이다. 안 그래도 신기한 식물인데 이 추위에 혼자서 새파랗고 축축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눈치 없는 풀 하나가 따뜻하고 축축한 이끼를 모체 삼아 자라나고 있다. 


철이 없네, 철이 없어. 
아니, 철이 아닌 때가 없네. 네가 시인이 노래한 그 식물이구나.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서 추워 죽겠는데도 꾸역꾸역 여기를 오나 봐.



철없는 이끼 


     

벌어진 밤송이 근처를 찾아보니 깨끗한 밤 하나가 남아있었다. 

빈 손으로 왔는데 흉도 보지 않고

빈 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자연의 넉넉함이 감사하다.    


받아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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