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상담하러 갑니다. no. 2
삼한시대에는 '소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신성한 제사가 이루어지는 곳, 도망자가 들어와도 함부로 잡지 않는 곳, 치외법권이 인정되는 곳.
그들에게 소도는 구별된 장소였습니다.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라 한다. 도망자가 그 속에 들어가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아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부도를 세운 것과 같으나 그 행해진 바의 선악은 달랐다.
<삼국지 중,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소도'>
중학교 역사시간에 소도에 대해 처음 배웠습니다. 그때 이후로 <소도>라는 단어가 뇌리에 깊게 박혔습니다. 구별된 장소라, 구별된 장소라, 구별된 장소라, 무엇이 구별되었을까?
동일한 사람이 드나드는데 어떤 힘이 소도를 성역으로 만드는 것일까? 어떤 힘이 선악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 시작은 거룩했으나 이후 죄인들의 값싼 도피처로 전락했다는 글을 읽은 후에는 또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졌길래 성역조차 자기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것일까?
회사 한 구석에 있는 상담실도 저에게는 소도입니다.
<황선미 프로>로 일을 하고 있지만 누군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저는 상담자가 됩니다.
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인 김 모 씨는 상담실 문을 열고 1인용 청색 소파에 앉는 순간 상담에 방문한, 내담자가 됩니다. 우리는 문 밖에서도 안에서도 동일한 한국말을 씁니다. 그러나 상담실 문이 닫히고, 문패가 <상담 중>으로 바뀐 이후부터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치료적 대화가 됩니다.
"안녕하세요. OOO의 OOO입니다."
"와~~ 꺄르르르르르"
"네, 수고하세요"
"OO님, 밥 먹으셨어요?"
"납기일 이렇게 미루시면 저희가 곤란하죠, 언제 된다고요?"
전화를 하는지, 회의를 하는지, 싸움을 하는지, 친목도모를 하는지, 일을 하는지...
상담실 밖에서 사람들은 열심히도 일을 합니다.
어떤 날에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들리고, 어떤 날에는 누구 목소리인지가 너무 분명해서 웃기고, 어떤 날에는 그와 나 사이의 공명을 침투해서 거슬리고, 어떤 날에는 그와 나 사이의 공백을 채워 반갑습니다.
"회사는 전쟁터네요."
"... 그러게요. 우리도 전쟁터 안에 있는데 전쟁터 밖에 있는 거 같아요."
"여기가 전쟁터 안이기도 하고 밖이기도 하네요. 그런 상담실에 있는 게 어때요?"
"... 묘해요. 회사인데 회사 아닌 거 같아요. 묘한 분리감이 느껴져요."
"그 분리감이 OO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나요?"
"편해요. 일하는 데서 멀리 오지도 않았는데 고요하고 쉬는 느낌. 근데 생각보다 시끄러운데요."
"ㅎㅎ 고요한데 시끄럽고. 이런 모순이 없죠. 전쟁터 한 복판에서 우리만 고요해요."
일주일에 한 번, 50분의 시간 동안 그와 나는 전쟁터 안에서 고요한 분리의 모순을 공유합니다.
무엇이 치료를 촉진하는 것일까요? 분리가 주는 자유일까요? 공유가 주는 연결감일까요?
그중 하나이던, 둘 다이던 저는 상담실이라는 구별된 장소 덕에 기본은 먹고 들어가는 남는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윤을 내기 위해 모인 사람들, 치열하게 일을 하는 사회적 관계 한 복판의 치료적 공간.
이 순간,
상담실이라는 현대적 소도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로서의 사명감이 묵직하게 차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