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 상담하러 갑니다 No.5
집단상담에 참여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별칭을 짓는 것입니다.
모여 있는 시간 동안 불리고 싶은 정체성을 정하는 거죠.
전반기 제 인생의 별칭은 단연코 슈퍼집 딸입니다.
제 나이 태어나기 전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부모님은 슈퍼를 운영하셨습니다.
슈퍼는 마트였을 때도 있었고요, 지하였을 때도 있었고요, 지상이었을 때도 있었고요, 정육점과 함께였을 때도 있었고요, 구멍가게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카운터를 볼 때 수동 계산기를 사용할 때도 있었고요, 포스를 사용할 때도 있었고요, 손님들에게 검은색 비닐봉지를 줄 때도 있었고요, 주지 말아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겉모습이 어떻게 바뀌었던 상관없이 저는 동네에선 다 아는 슈퍼집 딸이었습니다.
아무 데도 쓰여 있지 않습니다. 그들만 공유하는 암묵적인 약속입니다.
가령 가게 오픈 시간은 정해지지 않지만 주인은 늘 오전 8-9시 사이에 문을 열어 밤 12시에 문을 닫습니다.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365일 중 가게 문 닫는 날은 없습니다.
8-9시 오픈 시간, 가게 안으로 들여놓은 물건을 내놓느라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계산을 빨리 해 줄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 오는 단골은 아무리 급해도 빨리 해 달라고 재촉하지 않습니다.
여름밤 11-12시. 아침에 내놓은 수박을 다시 가게 안으로 넣어야 하는 시간. 이 시간에 방문하는 손님들은 좁은 가게 안이 아니라 바깥에서 줄을 섭니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추어진 주인과 손님 사이에는 유난스럽지 않은 눈치와 배려가 존재합니다.
유학 가느라 독립한 나이가 22살이니까 제가 본 22년 동안 우리 집 슈퍼는 한 번도 문을 닫은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22년 동안, 슈퍼집주인은
아침에 나가서 문을 열고, 물건을 내놓고, 장사를 하고, 물건을 집어넣고, 문을 닫는 행동을 거르지 않고 반복한 거죠.
행동을 반복하면 그 행동은 의식(ritual)이 됩니다.
비슷한 의식이 비슷한 사람들에 의해 집단으로 행해지면 그게 문화(culture)가 되고요.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여 보존하고자 하는 마음을 부여하면 전통(tradition)이 됩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저 역시 매일 아침 같은 행동을 반복합니다.
주차를 하고, 엘리베이터로 4층에 가서, 지문을 찍고, 발열체크를 하고, 열쇠로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여기까지는 '일 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진 제가 출근해서 돈을 벌기 위해 매일 반복하는 의식이고요.
상담실에 들어서서는
창문 네 개를 열고
프린터기 뒤의 간접조명, 소파 옆의 간접조명을 켜고
공기 청정기를 틀고
테이블 두 개를 닦고
소파에 낀 머리카락을 치우고
그날의 상담 파일을 꺼내고
기도를 합니다.
이건 '상담하는 사람'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제가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입니다.
운 좋게도 능력 있고 성실한 슈퍼집 사장님 어깨너머로 카운터 일을 배웠습니다.
'슈퍼집 딸' 주인 의식을 전통으로 지키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일주일에 다섯 번,
내 마음의 구멍가게로 출근해서 청소하고, 창문 열고, 오픈 준비를 합니다.
여러분의 의식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