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부러운 건 오랜만이었다. 박사학위를 받고,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며,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펼치며 사는 SNS 속 그녀의 모습이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났다. 첫째 아이가 아직 기어 다닐 무렵이라,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거의 할 수 없는 때였다.
질투는 상대적으로 나를 초라하게 하는 괴로운 감정이라, 나는 그에서 벗어나고자 질투의 뿌리를 더듬어보았다. 돌아보니, 내 삶은 질투의 역사였다. 남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뒤 외갓집에 맡겨져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던 어린 나는, 남동생에 대한 질투를 힘으로 사랑받기 위해 애썼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결국 부모님이 원하셨던 서울대에 두 번이나 불합격한 뒤 어딘가 남아있던 죄책감은 내게 질투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 질투는 내 안의 소화되지 못했던 결핍과 콤플렉스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이었다.
동시에, 질투는 더 이상 밖이 아닌 내 안을 돌보고 사랑할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경보이기도 했다.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그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中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연장되어 외부의 인정과 칭찬을 갈망하며 살아왔던 나는 늘 허기졌고, 목말랐다. 그것이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위의 시를 통해 나는 다시금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질투의 뿌리를 더듬다 만난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의 구절을 통해서는 기존의 틀을 깨고 시야가 확장되는 경험을 했다.
질투는 지도이다. 질투의 지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질투를 느끼는지 파헤쳐 보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여성 소설가의 성공은 단 한 번도 질투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의 성공과 실패에는 병적인 관심을 보이곤 했다.... 질투란 그런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두려워서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버젓이 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이다.
- 줄리아 카메론, <아티스트 웨이> 中
질투의 마음은 사실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정확히 보여주는 지표이자, 내 안의 무언가가 피어날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했던 것이다. 줄리아 카메론의 말대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시작하고, 그를 꾸준히 이어가자 질투는 눈 녹듯 사라졌다.
첫째가 어느 정도 자라고, 둘째까지 낳고 기르며, 나는 질투를 넘어서고 전환하게 하는 비법을 매일 연습하며 단련하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바로 '수희찬탄(隨喜讚嘆)'의 마음이다. 한자어를 풀이하자면, '따라서 기뻐하며 칭찬하고, 감탄하다'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기쁨을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다. 그런 마음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나와 결코 둘이 아님을 보고, 느끼는 눈과 가슴이 필요하다.
목 들기, 뒤집기, 걸음마, 처음 단어를 말한 순간, 처음 그린 동그라미... 아이들의 크고 작은 성장과 성취를 마치 나의 일처럼 기뻐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성공도 진심으로 기뻐하는 힘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함께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은 무엇보다 내 마음을 진정으로 풍요롭고 충만하게 해 준다. 나와 한 몸이었던 아이들을 보듬고 돌보고 사랑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 그리고 온 존재와의 연결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줄 세우기 식의 경쟁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돌보며 상생하며 성장해가는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기도를 할 때에도 나의 아이들이나 가족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이들과 존재들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게 된다.
이처럼 더불어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는 땅에 마음의 뿌리를 다시 내린 후부터, 더 이상 질투는 나의 힘이 아니다. 세상의 꽃들이 그러하듯,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의 꽃들이 가장 자신답게 피어나는 세상을 위해, 오늘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며 마음속 뿌리를 더 깊고 견고하게 내려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