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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비아나 Apr 28. 2022

매화꽃

내 시선의 끝과 시작, 그사이 애매한 공간 즈음으로 초록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포근함에 이끌리어 산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나의 발아래에 무언가 미끈한 것들이 밟혀 든다. 자연스레 떨궈진 시선 아래로 보이는 바닥에는 이름 모를 들풀과 잎사귀들이 빽빽이 자리했고, 매끄러운 풀밭 사이에서 메아리치듯 웅웅거리는 포근한 바람들은 스스럼없이 내 목덜미와 어깨로 밀려든다. 나무 끝자락에는 저마다 봄의 시작을 알리려는 듯 몽우리들도 돋아나 있다. 3월. 이 싱숭생숭한 계절에 나는 선암사와 송광사 그리고 금둔사로 향했다. 3곳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절이라는 것도 있지만, 3월의 초입을 거닐고 있는 나는 앞서 매화꽃을 떠올린다.

매화꽃은 단아하다. 차가운 서리와 쏟아지는 눈도 두려워하지 않고, 딱딱하게 얼어 있는 땅 위로 누구보다 먼저 꽃을 피워 봄의 향기를 뽐낸다. 꽃샘추위에도 흔들리지 않고 도도하며 창연한 고전미를 뽐내는 매화꽃. 가장 동양적이라고 각인된 인상 덕분에 우리는 매화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편백나무와 동백나무가 만들어낸 숲 사이, 서늘한 그늘이 내려앉은 길을 걷는다. 앙상한 겹벚꽃나무 군락지를 지나, 선암사의 더욱 깊숙한 곳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간다.  어디선가 밀려드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옷깃을 움켜쥐고서 바람에 저항해 보지만, 어디선가 스며드는 달큰한 향기에 취해 나도 모르게 입가에 얕은 미소가 번진다.

좀 더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담장 뒤편에서 쏟아지는 별빛들을 갈무리 해 놓은 듯 뽀얗고 허다하게 피어난 백매화가 나에게 어서 오라 손 인사를 건네고, 담길을 따라 늘어서서 매혹적인 붉은 빛을 뽐내는 홍매화의 치명적인 자태가 나를 유혹한다. 천연기념물 제 488호로 지정되어 있는 오늘 이야기의 첫 번째 주인공 선암매다. 볕이 들지 않는 응달에서도 환하게 빛을 밝히고, 애기 궁둥이 같은 방실방실함이 더욱 매력적이다. 싱그러운 오늘의 봄 풍경을 더욱 곱디곱게 만드는 매화꽃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선암사를 방문하기에 충분하다.


선암사와 닮은 듯 닮지 않은 숲길을 걷는다. 아침보다 햇살이 따사로운지 보송보송하게 마른 겉옷이 산책하기에 딱 알맞다. 빛살과 더불어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에 발장단을 맞추고, 등 뒤로 졸졸거리며 멀어지는 물길과 손 맞잡은 채 정돈된 오솔길을 오른다. 천왕문을 지나고 다리도 건넌다. 종고루 아래에 나 있는 길을 넘어 차분히 박혀 있는 돌계단을 오르자 그제야 눈앞에 거대한 위용을 뽐내는 보물 제 1243호 송광사의 대웅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매혹적인 팔작지붕의 수려한 나선형 처마를 따라 나의 시선이 이어진다. 처마의 끝자락에 다다를 무렵,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나무 한그루 눈에 밟힌다. 천지사방으로 고귀한 봄의 향기를 흩날리며 자리하고 있는 매화나무 한그루. 오늘 이야기의 두 번째 주인공 송광매다. 송광매는 고려시대 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야생백매화로서 300년이라는 세월동안 이곳에서 뿌리내리고 있다. 용트림하듯 길게 뻗어난 가지들과 우둘투둘하게 돋아나 있는 껍질들에 그간의 풍파가 고스란히 녹아나 있는 듯하다. 오랜 날 동안 처연한 달빛도 머금었는지 밝은 대낮에도 방긋하게 터진 꽃망울들에 투명한 예기도 서려있는 듯 한 모습이 몹시도 신비로웁다.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 남도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한다는 납월매가 자라고 있는 순천에 숨겨진 비경, 바로 금둔사이다.
금둔사 주차장에서 출발, 약 8분 남짓 산길을 오른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비실땀을 닦아 내고 계곡위에 놓인 홍예를 건너면 야트막한 장소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금둔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은근하게 매화내음이 깔려 있는 경내를 거닐어보자. 어디선가 찰카당 거리는 풍경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남도에서 가장 앞서 핀다는 납월매. 음력 섣달(12월)을 가리키는 ‘납월’이란 이름에서 보아하니 금둔사의 매화는 ‘설중매’가 아닐까 으레 짐작해본다. 추운 겨울의 기운을 꿋꿋이 이겨내고 일찍 피어난 매화는 얼마나 멋이 있을까 으레 상상도 해 본다.

이럴 수가. 상상 이상이다. 붉은색과 흰색 매화들이 한 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대웅전과 대웅전 옆 계곡은 물론 요사채 앞까지 자리한 매화들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과하지 않고 수수하니 자라있다. 홍매는 백매보다 앞서 꽃망울을 터뜨렸는지, 혹은 붉어지는 석양에 물들었는지 화사한 색감으로 내 눈동자의 빈 공간을 채워간다. 그에 발맞춰 내 얼굴도 서서히 붉어진다.     


추위와 역경을 뚫고 이른 봄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순천의 여러 매화꽃들처럼, 우리도 이 전의 아픔과 어려움들은 모조리 놓아두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도 내리고, 그에 걱정도 내리고 매화꽃 향기 만개해 있는 그곳에서 떨어지는 향기와 꽃잎을 맞으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첫 봄의 매화꽃을 사뿐히 즈려밟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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