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 그 이상의 무언가
우리의 만남은 누가 봐도 좀 특별할 것이다. 남자의 나라에서 만난 두 사람은 숱한 공통점을 바탕으로 하는 깊은 이야기들을 3일간 나누게 되고 떠난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둘은 여자의 나라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서로의 사는 곳 또한 바로 옆집이 되었다. 서로의 창가에서 서로가 사는 곳이 바로 보이는 그런 곳 말이다. 어떤 소설이나 영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와도 같은 전개가 바로 우리 이야기다.
우리 둘은 그렇게 첫 만남부터 연속되는 특별한 사건들에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 있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회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진지한 만남을 시작했다.
여기서 진지한 만남이란 결혼을 염두에 둔 만남임을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애틋한 감정만으로 시작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그런 취약한(fragile) 관계는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다.
물론 우리 두 사람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서로에게 잘 맞춰가야 하는 준비, 훈련의 기간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간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에 대해 감사하고 이 순간을 더욱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매일 마음 먹는다.
개인적으로 설렘이라는 감정에 속아 쉽게 사랑에 빠지는 이른바 ‘금사빠’와 같은 연애감정이 유행하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다. 20대 초반부터 젊음이라는 세월을 아끼기 위해 관계에 있어서만큼 특히나 매우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 삶이 더욱 사명에 초점을 맞추기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와 사명의 방향도 유사하고 신앙의 단계 역시 매우 성숙한 사람을 만났을 때의 설렘은 그동안 만났던 그 어떤 매력적인 이성을 만났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깜짝 놀라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아찔했던 그 순간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사실은 잊기 싫다. 그 기쁨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랍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소울메이트(영혼의 단짝)’ 같은 표현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어떤 존재라는 것의 큰 울림을 느꼈던 것 같다. 나와 닮은 영혼 혹은 나와 여생을 함께할 반쪽을 만났을 때의 그 내적 울림 말이다. 나는 그것을 그 반쪽의 존재를 인식할 때 퍼지는 ‘존재의 울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울림은 말 그대로 울리고 퍼진다. 즉 고정적이지 않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분명 처음 모습 그대로가 아니다. 때에 따라 울림의 폭이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아예 고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늘 적정한 수심을 유지한 채 파동에 변동이 있을 뿐이다. 그 파동이 때론 격렬할지 모르나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음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마치 바다가 언제나 그곳에 있으면서 때론 거센 파도가 몰아치거나 때론 잔잔함을 유지하듯 말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암흑 속 존재가 빛 가운데 찬란하게 발견됨으로써 이름이 붙여지고 비로소 존재라는 인식 테두리에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 세상으로 들어온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일 것 같다. 언제나 한결 같은 울림이진 않을지라도, 언제나 설렘이라는 감정 가운데 머물진 않을지라도,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그 울림을 간직한 묵직한 존재로서 내 삶에 존재할 것만 같은 사람 말이다.
또 나 역시 그의 곁에서 그런 울림을 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 무슨 역경이 몰려와도 다 받아주고 덮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어주고 싶다. 이런 꿈을 꾸게 해준 사람을 만난 내가 약간 낯설기도 하지만 이 현실 자체로 매우 설레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 두 사람을 태초부터 아시고 연결해놓으신 거라면,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런 서로의 울림 가운데서 공명하고 있는 거라면 더욱 감사할 수밖에 없다. 찬양이 절로 나온다.
자연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름다운 질서 가운데서 그 신성한 경외감을 발하듯이 우리 두 사람이 만나기 전부터 계획된 것과 서로가 만난 그 순간, 또 우리 관계의 자취 하나하나가 또한 이 세상에 신선한 울림을 주었으면 좋겠다. 이 우주가 우연으로 지어진 것이 아니듯 우리 두 사람의 만남이 정말 우연이 아니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