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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Aug 26. 2024

일회용 라이터를 기준으로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



  화요일 오후 여섯 시쯤이면 메일함 열기가 부담스러워진다. 매주 낯선 글감을 받고 그 단어에서 파생되는 기억이나 문장을 찾는 건 꽤 여러 번 해도 서투르다. 역시(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나에게 온 글감을 보자마자 써 내려갈 문장들이 바로 떠오른다면 그 주는 아주 운이 좋다. 대부분은 사나흘이 지나서야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온수를 등으로 맞거나 이를 닦아 낼 때 생각이 난다. 이번 주에 받은 글감은 [신 호]였다. 다시 펼쳐질 날을 기다리는 유년기 사진첩처럼 십 년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회상을 기다리다 깊이 잠들어 있는 기억을 뇌리 사이에서 빼냈다.  


  스무 살 여름이었다. 대전시 서구 둔산동에 있는 빌딩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무실 이전이었다. 사무용 책상과 회전하는 바퀴가 여럿 달린 의자와 철제 케비닛들을 들어내 빌딩 입구 근처에 모아 두었다. 아버지가 부른 용달업자가 오게 되면 바로 짐을 싣고 이동할 작정이었다. 군데군데 녹이 슬어 있는 하얀 3.5t 트럭을 몰고 온 그 사람은 반삭 머리를 한 서른 중반 정도 되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었다. 나는 그를 도와 짐들을 실었다. 습한 날씨에 그가 입은 회색 티셔츠는 땀에 젖어 등과 겨드랑이 부분이 짙어져 갔다.   


  장거리 운행 전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짐을 모두 싣고 이름이 난 냉면집에 갔다. 아버지와 내가 마주 보고 앉았고 그가 내 옆에 앉았다. 유명한 집의 냉면은 분명 달랐다. 딱딱한 면이 그랬다. 이곳만의 맛일 터라 여기고 먹기로 했다.

“안 익은 거죠?” 그가 말했다.

냉면을 아주 잘하는 집이라는 아버지의 설명이 따라붙었지만 아무래도 면이 덜 삶아진 것 같았다. 냉면을 남긴 아버지가 화장실에 갔을 때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얼마 전에 내기를 했어.” 그가 말했다. 

“내기요?” 내가 되물었다.

“이쪽 일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동차 시합을 하는 거야. 대전역부터 서대전역까지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돈을 따는 거지.”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일에 기가 막혔지만 들어내지 않으려 했다. 표정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눈은 분명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내 눈을 보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신호를 지키든 말든 그냥 밟는 거야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지.” 

그가 갑자기 왜 나에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돈을 딴 기쁨이었는지 무용담을 뽐내고 싶었는지 모를 일이다. 아버지가 없는 사이, 둘 사이에 나눈 대화였다. 내 눈이 다소 커진 건 그가 들려준 이야기보다 그의 입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십여 년이 지나서 오랜만에 그가 생각났을 때도 언청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곧바로 따라붙었다. 지금에서야 검색으로 알게 되었지만 의학용어로 입술입천장갈림증이라 한다. 짐을 실은 트럭은 경부고속도로를 탔다. 아버지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와 아버지 사이에 내가 끼어 있다. 세 명 모두 말없이 자기 일을 했다. 그는 차를 몰았고 아버지는 의자에 기대어 창밖을 보고 있다. 나는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상상했다. 맑은 날씨의 대낮의 풍경이었다. 도로 위 자동차들 사이에서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내달리는 트럭 무리. 클러치를 밟는 왼발과 가속 페달을 밟는 오른발. 변속기어를 조작하는 오른손. 급히 핸들을 꺾는 왼손. 아스팔트에 찢겨버릴 것만 같은 타이어 소리에 경악한 사람들이 실색한 얼굴로 보고 있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지 오래되지 않아서 아버지는 그에게 휴게소에 들르자고 했다. 그는 화장실에 갔고 아버지와 나는 커피를 사러 갔다. 

“운전하는데 꾸벅꾸벅 졸아.” 아버지가 말했다. 

그가 없는 사이, 아버지가 나에게 한 말이다. 아버지와 그는, 그들 사이에 끼어있던 나에게 각자 그들의 말을 했다. 나는 운전 중에 조는 그가 얼마 전 참가한 내기가 몇 시간 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방금 산 커피를 그에게 건넸다. “커피 좀 마시고 천천히 갑시다.” 아버지가 말했다.  


  트럭은 강남구 개포동 한 오피스텔에 정차했다. 나는 그를 도와 짐을 내리고 사무 가구들을 엘리베이터에 실었다. 억수가 퍼붓기 시작했다. 장마의 시작이다. 그의 티셔츠는 비에 젖어 군데군데 짙은 회색이 되어갔다. 그와 내가 짐을 가져오면 아버지가 오피스텔 내부에 배치했다. 여러 번 왕복해야 짐들을 옮길 수 있었다. 1층 엘리베이터에 짐을 실어 가다 보면 곧 문이 닫히는 바람에 짐을 잡고 있던 손은 다시 버튼을 누르느라 손이 모자랐다. 허둥거리는 나의 모습을 본 그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누런색 투명한 일회용 라이터를 꺼내 엘리베이터 왼쪽 문에 끼웠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멈춰 서 있었다. 문이 활짝 열린 채로. 내가 트럭에서 다른 짐들을 내리는 동안에도 엘리베이터 문은 그대로였다. 문틈 사이에 여전히 라이터가 끼워져 있었다. 남은 짐을 모두 싣고 그는 엘리베이터 문에 끼어놓은 라이터를 빼냈다. 제법 긴 시간 열려 있던 문은 긴- 하품을 끝내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모든 작업을 마친 그는 주차장 처마 끝에 고여 떨어지는 빗방울 아래에서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개비를 다 피우고 트럭에 올랐다. 그대로 트럭을 몰아 장맛비 속 차량 무리 속으로 끼어들어 갔다. 담배를 태우지 않지만 나는 그 후로 라이터를 꽤 유용하게 사용했다. 가령 웨딩홀 파트타이머로 일하며 연회장의 커다란 원형 테이블들을 옮길 때마다 라이터를 빌려 엘리베이터 문에 끼웠다. 모든 엘리베이터 문 사이의 틈은 일회용 라이터를 기준으로 설계되었을지도 모른다.  


  마트에서 장을 봐오는 엄마의 짐을 받아서 두 손 가득 들고 엘베이터에 탔다. 닫혀가는 문에 덜컹- 몸이 끼어버렸다. 다시 열린 문이 닫히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높아져 가는 숫자를 보며 문에 끼워진 라이터가 생각난다. 그날의 일이 내 뇌리의 골에 여전히 끼워져 있다. 그날의 누런색 투명 라이터처럼. 그의 뒷모습을 본 후 긴 시간이 흘렀지만 여러 트럭이 경주 내기를 했다거나 그로 인한 사고 소식은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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