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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Sep 11. 2024

흰 블라우스 단추를 아래서부터 풀었다




  아파트 정문을 막 지나오던 참이었다. 새로 받은 글감 [심부름]이 머릿속에서 심(心)과 부름으로 나누어졌다. 아파트 동과 동 사이에 난 길을 걸으며 그 나누어짐은 언젠가 또는 지금.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마음 다해 부르던 날을 헤아리게 했다. 스물네 살, 잠에서 깨면 일어나지 못할 만큼 이불이 무거웠던 적이 있다. 지쳐 잠드는 매일 밤, 이불 위로 상실감이 쌓여갔다. 눈을 뜨면 나는 무거워진 이불에 깔려있었다. 잠이 덜 깬 체 처음 느껴보는 상실감의 무게에 옴짝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


  미세한 먼지들이 낀 뿌연 하늘이 보기 거북할 것 같아 밤이 되어서야 창을 열었다. 밤은 그나마 봐줄 만했다. 밤도 새카맣기보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모를 뿌연 띠가 밤을 두르고 있다. 창밖 먼 곳 한겨울의 아파트 재건축 현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타워크레인 불빛이 텀을 투고 깜빡인다. 재촉하지 않는 느리막한 간격이다. 먼-어둠 속에서 나에게 보내는 시그널인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인가 나는 그걸 알아야겠다. 내 눈은 차갑고 까만 커튼이 쳐진 듯한 창밖을 두리번거린다. 네온사인이 발하는 색소폰 동호회 간판은 애써 밝게 웃는 것처럼 오히려 처연하다. 시선이 창밖 곳곳을 뒤적여가며 의식도 내 안에 어두운 곳들을 헤집는다. 의식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 속 침전물이 흐트러진다. 작은 인물사진이 모여 한 명의 큰 이미지를 만들어 내듯 침전물은 부유물이 되어 누군가의 얼굴을 떠오르게 했다. 내 안팎으로 전부 어두워서 더욱 하얀 얼굴이었다. 밤에 처음 만나 대부분 밤에 만났던 사람. 오히려 낮에 보는 게 어색했던 사람. 자주 입었던 검정 블레이저와 검정 스커트처럼 밤에 가까웠던 사람. 


  그녀와 나는 초등학교 사 학년에 같은 반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좋아해 줬다. 짝이 되어 내 볼에 입을 맞추었던 기억이 있다. 새 학년이 되면서 그녀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심지어 같은 중학교에 다녔다는 걸 다시 만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성인의 나이가 되어 그 당시 사용하던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그녀의 사진을 보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미 십 년도 넘은 일이라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지만 지금도 나는 종종 생각한다. 


‘만약 그때 내가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연락이 온 그날 밤에 나가지 않고 AC 밀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챔피언스리그 경기나 봤었더라면…’ 


   나에게 그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성인 같았다. 외모도 옷차림도 나의 주변에서 보는 여자들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군 복무를 하는 동안 애티가 제법 벗겨졌지만 컨버스화를 신고 찢어진 청바지에 플란넬 체크 셔츠를 입은 대학생이 진한 화장을 하고 오피스룩을 입은 사회인을 만나는 건 괴리가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계절에 어울리는 색의 옷보다 유니폼 같은 블랙컬러 옷이 더 잘 어울렸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린 빠른 연생이었지만 많은 면에서 나보다 자연스러웠다. 가령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웨이터에게 긴 주문과 요구사항을 빠짐없이 말한다든지 호텔에서 체크인하는 일이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에게 다가서면 담배 냄새를 맡곤 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입을 맞추면 담배 냄새는 더 깊어졌다.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를 지나온 담배 냄새는 어딘가 달게 느껴졌다. 우연히 맛본 어른들의 계피 사탕에 한두 번 손을 대어가다 그 맛을 알아버린 아이처럼 나는 그녀 입술 가까이 더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나온 담배 냄새를 맡았다. 여자들을 스치면 사용하는 향수나 화장품에 따라 풍기는 향이 있다. 심지어 어떤 향은 지나쳐간 사람을 되돌아보게도 한다. 그녀에겐 담배가 그랬다. 무리 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담배 향이 어울렸다. 그녀가 떠오를 때면 매캐한 냄새가 한 김 빠진 다크초콜릿 같은 마일드세븐 향이 코 주위에 어른거린다.   


  그녀는 며칠 동안 연속 근무를 마치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내가 있는 도시로 왔다. 두 시간을 넘는 거리였다. 터미널에서 그녀를 만나면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호텔로 갔다. 어떤 날에는 방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진 우리는 한동안 널브러져 있었다. 올라오는 술기운에 호텔 방 안은 둘의 숨소리만 들렸다. 거친 숨이 다소 죽어갈 즈음 그녀는 살아온 날을 들려줬다. 말을 이어가던 중에 입고 있던 흰 블라우스 단추를 아래서부터 풀었다. 세 번째 단추를 푼 그녀는 블라우스를 갈랐다. 배가 보였다. 새하얀 속살에 색이 다른 한 땀이 있었다. 상처였다. 시간에 옅어졌지만 칼에 찔린 상처였다. 그녀가 살아오며 남자들에게 받은 상처는 그녀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칼에 찔린 날 그녀는 배에서 나오는 피가 너무 뜨거웠었다고, 말했다. 너무 뜨거웠던 건 피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고 했다. 그녀의 배에 칼을 찌른 사람은 사 년을 함께한 애인이었다.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난 사실을 그녀에게 들켜버렸다. 그 후 받아주지 않자 일을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나의 고교 동창이었다. 


  상처라는 건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곳 동시에 생기는 것 같다. 한때에 생긴 상처였지만 낫는 일에는 시차가 있다. 보이는 면에 난 상처가 나았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면의 상처까지 낫는 것만은 아니었다. 사정에 따라 영영 아물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처는 몸에만 아문 것이었다. 아물었다 해도 그 흔적을 보게 되면 잊고 살았던 기억을 소환해 편치 않게 했다. 겨우 맞붙어버린 살같이 욱신거릴 만큼. 상처는 그런 것이다. 그녀는 일회용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담배 필터를 깊게 빨았다. 칼에 찔리고 피를 흘린 밤 몸속을 빠져나간 뜨거운 무언가의 상실 때문이었을까. 그녀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빠는 건 잠시나마 담배로라도 뜨거운 무언가를 채워보려는 행위 같아 보였다. 그녀의 눈은 창밖을 향해 있었지만 실로 보고 있는 건 그녀 안에 지난 일들 같았다. 고즈넉이 바라보던 눈 위 눈꺼풀이 깜빡이고 긴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녀의 속까지 들어갔다가 밖으로 나온 담배 연기는 어딘가 모르게 구슬프게 올라가 천장 위에 닿기 전에 사라졌다. 아침이면 술기운에 지쳐 잠든 그녀 옆 테이블 위 재떨이 속에는 빨간 립스틱이 묻어있는 구겨진 담배 필터가 쌓여 있었다.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칼에 찔려 피가 난 배를 봉합하고 응급실에서 나온 그녀는 관계에 관한 생각이 아예 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남자에게 받은 상처의 치유를 지친 몸과 마음의 안식을 다시 남자들에게서 찾았지만 의심과 집착은 더 커졌다. 이해보다 오해가 더 많은 관계뿐이었다. 하나의 관계가 끝이 나면 닿을 수 있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에게 나도 그런 남자 중 하나였다. 우리가 만난 건 그녀가 지난 관계를 끝낸 밤의 다음 날 밤이었다. 그녀가 나에게서 찾는 것들이 전부 소진되고 매일 고갈 되어가는 나를 느껴갈 즈음 아침에 문자 메시지를 남기고 그녀는 나를 떠났다. ‘우리 헤어져.’ 일주일 정도가 지나 그녀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남자와 교재를 시작했다. 그 남자와의 시간은 나와 함께한 시간보다 길었지만 이전 사람과 나와 다음 사람의 결말은 모두 같다. 


  그녀가 어두운 방에서 뿜어낸 한숨 섞인 담배 연기처럼 오늘 밤하늘에도 뿌연 먼지가 겨울밤 공기에 엉켜있다. 잠시 창을 열어 한숨을 불어본다. 허연 입김이 하늘로 올라가다 금세 사라진다. 밤하늘 아래 보이지 않는 매캐한 끈이 밤과 나를 꽉 묶고 있는 것만 같다. 찬 공기에도 나는 창을 열고 제자리에 서서 창밖으로 이미 오래전 지나가버린 밤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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