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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쥰세이 Sep 18. 2024

귀로 듣지 않고 코로 맡지 않고도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왔다. 켜져 있는 스탠드의 타이머 버튼을 터치한다.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다. 세 가지 컬러를 선택할 수 있지만 대부분 백열전구에서 퍼트리는 빛과 유사한 색을 설정해 둔다. 오십 분 뒤면 꺼질 전등 빛의 도움을 받아 얼굴과 몸에 보습 제품을 바르고 머리카락을 치우거나 방안의 미비한 일들을 마무리한다. 침대에 앉아 벽에 기대어 휴대전화 잠금을 푼다. 하루의 노곤함에 멍-한 상태로 기계처럼 움직이는 엄지손가락이 피드를 넘기다 보면 아들의 소리를 듣곤 한다. 귀로 듣는 소리는 아니다. 무의식 어딘가에서 유영하던 기억의 소리가 의식의 경계선을 지나다 보면 나에게로 들려오는 것 같다. 이를테면 리오니가 내 방 문고리를 흔드는 소리. 주스가 되겠다고 케첩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멋쟁이 토마토[1]의 노래를 들어간다그쯤이면 스탠드 불이 꺼진다.      


  리오니와 리아나가 아메리카로 돌아갔다. 두 달 동안 안방에 자리했던 리아나 침대를 뺐다. 방이 넓어 보였다. 제법 부피가 있는 가구를 뺐으니 그렇겠지만 처음 이사 왔던 날 빈방에 “아!” 하고 소리 내면 작은 메아리가 쳤던 안방처럼 휑-하다. 집에 있던 사람 중 가장 작은 존재의 빈자리가 가장 크다. 리아나 침대를 분해해서 리오니 방에 쌓아두었다. 리오니 방에는 머무는 계절 내내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지만 볕은 잘 들었다. 쌓여있는 리아나 침대 아래 있는 리오니 침대에 볕은 내리지만 엉덩이 위로 빵빵하게 튀어나온 기저귀를 차고 누어서 나를 부르던 온기는 없다. 녀석들이 떠난 후에 이곳에 머물렀던 흔적들을 하나둘 마주한다. 거실 나무 바닥을 닦으면서 떨어진 장난감에 찍힌 자국. 성인들의 것과 사람이 신는 건가 싶은 작은 신발이 놓여있던 현관이 듬성듬성한 아이들의 치아처럼 슬리퍼와 운동화 두 켤레만 거리를 둔 채 남아있다. 찍힌 거실 바닥은 남은 자국이 흔적이 되지만 가득 차 있다가 빈 현관은 신발들의 부재가 그 흔적이 된다.


  이튿날 유아용품 대여 업체에서 침대 두 개와 모빌을 수거하러 왔다. 미리 거실과 현관 사이 중문 앞에 분리해 놓은 침대와 프레임에 두르는 쿠션. 인형들이 매달려 있는 모빌을 가져다 두었다. 여동생은 출국하기 며칠 전부터 짐을 쌌다. 짐을 캐리어에 넣을 때마다 스케치북에 적어둔 목록에 가위표를 쳤다. 그 꼼꼼함에 아이들 체취가 스며있는 건 남아있지 않았다. 이 가구들만 나가면 집에 아이들의 물건은 더는 없다. 언젠가 엄마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있다. 나와 동생이 조카들만 했을 때 며칠 동안 외가에 머물렀다. 집으로 돌아갈 무렵 외할머니는 짐을 싸놓은 엄마에게 한마디 했다고 한다. “기저귀 하나 안 남기고 가냐? 독한 년.” 외할머니는 머물던 사람들이 떠나고 아이들의 체취가 묻은 물건 하나 손에 쥐고 싶은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업체 직원은 큰 짐부터 엘리베이터 앞에 세워갔다. 짐이 대부분 나갔을 즈음 직원은 나에게 무언가 건넸다. 내가 받은 건 카드였다. 캥거루와 유니콘이 그려진 각각의 카드와 에스파냐와 스위스 국기가 있는 카드였다. 잠이 오지 않는 리오니가 언젠가 넣어 두었던 것이다. 자기 싫은 리오니가 침대에 누어 뒹굴뒹굴하다가 쿠션 지퍼를 열고 카드를 넣어 두었을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났다. 동물 찾기 놀이를 하면 리오니가 찾지 못할 때마다 내가 “땡-” 하며 이마를 터치했던 카드가 내 손에 남았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코에 가져다 대본다.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지만 한밤중에 침대에 앉아 듣는 소리처럼 기억에서 나는 리오니의 보드라운 내음을 맡는다.


  아이들 가구와 물건이 모두 빠진 빈자리를 마주하면 눈에 가득 찼던 모습들이 비어있다. 빈 것들에 허전해져 다른 무언가로 채워볼까 싶다가도 더 자라서 돌아올 아이들이기에 이번보다 더 채워줄 아이들이기에 다른 것들로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한다.


          

[1]동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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