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면도에 관한 것입니다. 오랜 시간 주변의 잔소리를 감내하며 수염을 길러온 나는 면도한 얼굴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힘들게 등반하여 산 정상에 겨우 올라서니 이 산이 아닌가 벼, 같은 거죠. 저녁 무렵에 하는 면도라는 행위 자체와 면도를 마친 거울 속 모습이 마음에 꼭 드는 요즘입니다.
오늘도 저녁 무렵에 면도를 합니다. 라이터 불을 켜 인센스 끝에 붙입니다. 타오르던 불꽃이 일렁이다 사라지면 연기가 피어납니다. 곧게 곧게 욕실 천장에 닿아 퍼져가면 거기서부터 면도의 시작입니다. 세면대 속에 질레트 면도기를 놓고 따듯한 물로 세안합니다. 얼굴에 물기를 닦아내고 도루코 셰이빙폼을 얼굴에 도포합니다. 얼굴을 닦아낸 온수에 차가웠던 면도날이 불려졌습니다. 불려진 날은 얼굴 위를 지나갑니다. 순방향으로. 밤새 내린 눈밭 위에 한 줄 눈을 지워가는 넉가래처럼 질레트 면도기가 셰이빙폼을 밀고 내려갑니다. 여러 번 내려가는 면도기에 얼굴에서 폼이 사라져 갑니다. 다시 한번 셰이빙폼을 발라줍니다. 생크림을 흠뻑 뒤집어쓴 것만 같은 얼굴로 면도기가 올라갑니다. 역방향으로. 면도기를 거꾸로 들어 앞서 한 면도로 짧아진 수염을 밀어갑니다. 이제 면도를 마쳤습니다.
방으로 돌아와 화장대 앞에 앉습니다. 방안 겨울 공기를 한 줌 모은 왼손 홈에 애프터셰이브를 부어줍니다. 애프터셰이브가 고여있는 왼손과 오른손 손바닥을 맞대어 문지릅니다. 두 손바닥이 얼굴을 두드립니다. 면도날이 닿았던 모든 부분에 묻혀갑니다. 피부를 터치해 가는 착- 착- 소리가 꼭 나 줘야 합니다. 면도날에 피가 나지 않더라도 날카로운 면도날이 지나간 곳은 미세하게 베이곤 합니다. 면도날이 쓸고 간 자리마다 후-끈 해지는 성인 남자의 맛이 꽤 좋습니다. 이 맛이야말로 면도라는 행위를 완성하는 궁극적인 맛이라 생각합니다. 습식 면도가 끝난 볼은 촉촉하고 쫀득합니다. 내 뺨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렇습니다. 잠에 들기 전까지 꽤 여러 번 볼을 톡톡- 건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