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삽입술을 한 뒤에도 난시가 심해 안경이 필요한 내 눈이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과 멋진 풍경을 담을 수 있어 소중하다.
울적할 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귀도, 맛있는 음식 냄새를 맡게 해주는 나의 코도, 아이들의 볼과 귀 사이, 그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나의 손도 나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언제까지나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을 느끼게 해 줄 것 같은 나의 감각기관들인데, 병원에 있어보면 지금 내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잃은 채로 살고 계신 분이 참 많다는 것을 느낀다.
어떤 기분일까..?
외래에서 보는 한 아이는 눈에 지속적으로 흔들림(안진, nystagmus)이 있다. 이석증을 겪어본 나로서는 저렇게 하루 종일 흔들리는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게 상상이 안되는데 그래도 이 친구는 전화기, 문손잡이, 에어컨 등 특징 있는 물건과 색깔을 제법 잘 구별한다. 태어날 때부터 흔들렸던 세상이었기에 불편하다는 생각조차 없이 나름의 방법으로 시각적 자극을 인지 하는 법을 익힌 것 같다. 의사 가운이 무서워 계속 진료실에서 나가려고 문고리를 당기는 친구라 어제는 가운을 벗고 "이모가 좀 만질게~"하면서 진료를 했다.
인사하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 아이도, 늘 밝은 미소의 아이 어머니도 크고 대단하게 느껴졌던 것은 내 기분 탓일까.
병동에는 보청기를 귀에 끼고 매일 혼잣말을 하시는 할아버지 한분이 계신데, "내가 병이 들어서 곧 죽는다"라고 이야기하신다. 그러면 내가 실제 암이 들어있는 배를 만지면서 "아직은 아닌데요~" 말씀드리면 씩 웃으시면서 다시 약을 달라, 똥이 안 나온다, 여기가 아프다 등등 혼잣말을 계속하신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분을 모두가 좋아한다. 솔직하고 귀여운 매력이 있어 보청기 끼고도 대화가 잘 안되지만 나도, 간호사도, 간병 여사님도 모두 이 분 앞에서는 그저 웃는다.
이분의 앞 병실로 갔더니 내가 만나 뵈려고 했던 환자분이 재활치료실에 계신다고 했다. 좀 있다 치료실 가야지~ 하고 일단 다른 층으로 옮겼다.
척수손상이 있지만 수술 후 많이 호전되어 걷는 데는 크게 문제없으신 80세 할머니는 우리 병원에 오실 때부터 왼쪽 귀가 문제였다. 재발하는 중이염으로 매일 귀에서 물이 나오는데, 통증이 심할 때는 제법 오랜 기간 정맥으로 항생제 주사를 맞아야 한다. 수술도 안 하기로 했다고 하니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이야기 듣고 할머니가 완강히 거부하셨다고 한다), 나로서는 최대한 통증 없게, 염증 없게 해 드리는 것이 최선이라서 늘 귀가 신경 쓰인다.
"조금이라도 들리세요?"
"왼쪽으로는 하나도 안 들려~"
그런데 그다음 이어서 하시는 말
" 눈은 왼쪽이 보이는데 오른쪽은 안 보여, 짝짝이야~~ 내 눈이랑 귀랑 좀 바꿔줘"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짝짝이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눈과 귀가 잘 보이는 눈과 아프지 않고 잘 들리는 귀로 쏘옥 교체되는 상상을 했다. 진짜 이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머금은 채 아까 못 뵈었던 그분을 찾아치료실로 갔다. 이분은 하지마비가 심하신 분이지만 상반신 위로는 모든 감각기관이 정상인 분이다. 늘 유쾌해서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런데 그날은 나를 보자 치료를 잠시 중단하시더니 짐짓, 진지한 얼굴로 "냄새가 안 나요."라고 하셔서 정말 놀랬다.
증상 생긴 지 며칠 됐는데 괜찮아지겠거니 생각하면서 그냥 두고 보셨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무서우셨으리라..
코막힘도 없고, 양쪽에 갑자기 찾아온 후각 마비.
이 증상은 반드시 뇌를 포함한 정밀검사가 필요하다.
퇴근 전
보호자 분과 상담한 내용을 알려드리기 위해 방문했을 때는 저녁식사 중이셨는데 음식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고 하셨다.
우린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걱정되고 두려웠다.
어린 시절,
피아노 학원에서 악보가 흐릿하게 보여 연습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선생님께 혼났던 국민학교 2학년 어느 날, 엉엉 울면서 제일 먼저 엄마께 안 보인다 털어놓았었다.
"엄마 눈이 안 보여요"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 두려움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앞서 만난 다른 분들이 어떤 기분일지, 그분들이 느끼는 세계는 어떠할지는..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마이너스 10 디옵터까지 나빠진 나의 눈을 도와주었던 뱅뱅이 안경처럼, 못생겨도 좋으니 이분들의 오감을 지킬 수 있는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