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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담 Sep 16. 2019

지금이라서 괜찮아

익숙함에 젖어 진정한 나를 만나지 못한 관계의 모호성에 관하여

지금 10대의 아들에게 내가 가끔 하는 말은 "정말로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고민을 해보라고 한다."

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살아 마흔아홉 번의 새해를 맞이한 것 같다.

태어났으니 숨을 쉬었고 먹었고 살았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살아온 환경이야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생각은 하고 살았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다 대치동에 자리 잡아 살고 있는 친구에게 3년 전 이런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난 어떡해서든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이 동네에서는 살고 싶지 않았거든."

그 친구는 왜 그 말을 아꼈다가 이제야 이야기하는 걸까?

함께 했던 그 시절에 그 이야기를 했더라면 나도 무언가를 생각해보았을 텐데...... 하는 위로를 해보지만 난 역시 개척자 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정의는 변하지 않았다.

"여기 사람들은 많이 꾸미지 않아.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를 입어도 딱 맞는 옷을 사 입거든."

매장에 가서 옷을 사본적이 언제였던가?

인터넷 쇼핑에서 대충 맞는 옷을 주문하고 주문한 옷에 내 몸을 맞춰

크면 허리띠를 조이고 작으면 옷을 끌어내려 입었는데

난 왜 반품할 생각조차 안 하고 살았을까?

내 인생도 대충 맞춰 살아온 것 같아 낯이 뜨거워진다.



주어진대로 살았지 개척해보려 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살았지 도전해보려 하지 않았다.

"양육비 하나도 안 받고 괜찮겠냐!"는 판사 앞에서 그 남자가 보란 듯이 호기를 부렸다.

"저 사람보다 더 잘 키울 자신 있습니다."

10년이 지나 생각해보니 양육비를 받았더라면 조금 더 아이를 나은 환경에서 여유롭게 키울 수도 있었겠다 싶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출근시간은 정해져 있어도 퇴근시간은 정해지지 않는 일을 하며 돌봐주는 사람 없이 아이를 혼자 키우는 게 만만치 않다.

중학생이 된 지금도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를 보면 화가 날 때가 있다.

그건 아이를 향한 외침이 아니라 나를 향한 외침 이어야 한다.

양심이 있는 엄마니까!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해본다.

조금 더 아이를 강하게 키웠어야 하는데, 조금 더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 키웠어야 하는데, 사는 게 바빠서 일을 해야 산다는 마음 때문에 아이의 마음 알아주는 게 부족한 엄마로 지낸 나를 향한 화살을 던져본다.

겹겹이 껴입은 옷을 하나 둘 벗어던지고 싶은데 나에게는 그만한 용기가 없다.


난 무엇을 향해 달려왔을까?

내가 좋아하는 일이 아이들과 뒹구는 일인 줄 알았다.

그것이 삶의 수단이 가미되어서일까?

이 시대는 보육교사에게 원하는 게 너무나 많다.

뒹구는 건 당연한 거고,

서류도 완벽하게 해내야 하고,

청소도 반짝하게 해야 하고,


시간에 상관없이 학부모님과 원장님들의 단톡을 받아내야 하는

장소만 옮겼을 뿐 집에서도 연결고리는 끊이지 않는다.

주말에도 밀린 일을 하느라 나의 고개는 늘 땅을 향해 있다.

글을 쓰고자 산 컴퓨터에는 온갖 어린이집 서류로 가득 차 있다.


고개 들어 맑은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는 언제 가져볼까?

한 낮 태양이 쨍하게 내리쬐는 날 창이 큰 커피숍에 턱 괴고 앉아 멍 때리는 나를 그려볼 수나 있을까?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인 줄 알았다.

언제부터인지 그들을 흘낏 쳐다보며 미래를 그려나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고정관념이었다.

부러우면 부럽다 하면 되는 거고 싫으면 싫다고 하면 되는 건데

나의 감정을 숨기고 생활하는데 나는 너무 익숙해져 있는 미생이었던 거다.

틀을 깨보지 않았으니 바깥세상을 부러워기만 했지 그 바깥사람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틀 안에 짜인 생활을 불평만 했지 한발 내디뎌 보리라는 용기를 내보지 못했다.


그랬다.

나는 겁쟁이였다.

혼자서 잘 살아가는 것 같지만 그어진 선안에서 살았지 금을 밟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다.

조금 벗어나면 어때? 다시 들어가면 되지. 직선이 아니면 어때? 곡선의 미를 느끼면 되잖아.

이건 내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외침이었지 나를 향한 말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하지 못했다.


왜일까?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무엇을 위해 달려온 걸까?

겹겹이 걸친 옷을 벗어던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껴입고 가느라

질질 끌려가는 내  발톱에 멍이 들고 빠져나가고 새로운 발톱이 몇 번이나 재생되는 시간에

미련 맞게 버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걸까?


두려웠다.

내 어깨에 내려앉은 짐이 늘어날 때마다 줄어들겠지 하고 체념하며 지냈다.

 나이가 더해지는 만큼 짐도 더해지는 현실을 만났다.


미련하다.

잠깐 멈춰서 짐을 내려놓고 두 팔 두 다리 쭉 뻗을 생각을 못해봤다.

내려놓으면 이자가 쌓여가듯 내 짐도 늘어날 것 같았다.

버리고 내게 필요한 것만 골라서 가면 될 것을

난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을 한 걸까?


'지금이라서 괜찮다'라고 내가 나에게 용기를 내어준다.

기꺼이 너는 다른 세상으로 한 발 내딛을 수 있어.

지금은 두렵고 생소하겠만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도 버텨온 너에게

이제는 상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훌훌 벗어서 알몸을 보여주더라도 이제 멈추고 필요한 옷가지만 챙겨서 다시 내디뎌 보는 거야.


이때 위로되는 글 하나가 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내가 아무리 힘들게 살았어도 마크 타이슨보다 처맞지는 않았으니 도전해 보는 거야.

지금이라서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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