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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사랑이 거봉 May 28. 2024

5월 하순의 아침 소묘

새벽에 잠이 깹니다. 5시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밖에 동이 터 옵니다. 생각해 보니 하지가 한 달도 안 남았습니다. 1년 중에 밤이 가장 짧은 시기입니다.


어떤 책을 읽어 보니 봄에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몸의 생리에 맞답니다. 그런데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납니다. 밤 10시만 넘으면 벌써 졸립니다. 책을 몇 페이지 읽지도 못하고 쿨쿨 잠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 깨는 것은 아닌데 설핏 잠이 깹니다.


잠이 깰 때는 거의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내용도 다채롭습니다. 예전 직장과 관련된 꿈도 있고 미래에 해야 될 일에 대한 꿈도 있고 사랑을 갈구하는 꿈도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아버지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보기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꿈은 정말 자유롭지만 깨고 나면 너무나 허망합니다.


일전에는 산 위에서 똥물이 철철 흘러내리는 꿈을 꾼 적이 있어서 로또를 샀는데 꽝이었습니다. 또 얼마 전에는 시원하게 소변을 보는 꿈을 꾸면서 기분이 너무 상쾌하여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평범한 하루였습니다.


요즘은 특별한 일 없이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면 그것이 곧 행복이고 기쁨이라 느낍니다. 좋은 일이 있어야만 행복이 아니라 순탄하고 평탄하게 아무 일 없이, 대과 없이 하루를 보내는 것이야말로 행복이 아닐까요.


아침에 일어나 글도 써 보고 지난날의 사진 갤러리도 정리하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지내야 되나 생각도 해보고 잠깐 명상에 잠겨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옆방에서 자던 아들이 부스럭거리며 출근 준비를 합니다. 아들은 회사에 일찍 가야 하기에 6시면 벌써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 소리에 덩달아 내 마음도 과거의 직장생활로 돌아갑니다.


나는 밤 12시 넘어 술에 취해 귀가했어도 일어나는 시간은 매일 똑같은 6시였습니다. 잠자는 시간이 길든 짧든 일어나는 시간은 거의 동일하였죠.


술이 덜 깬 머리를 찬물로 감아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간단하게 아침을 먹은 후 회사로 향하곤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할 일이 많고 할 말도 많았는지 모르는 바쁜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다 퇴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회사 생활 루틴 몸이 익숙해져 있나 봅니다. 아직도 아침이면 뭔가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습니다.

'오늘은 회사를 나가는 날이 아니야!'


나는 얼른 옷을 걸쳐 입고 선글라스를 쓰고 모자를 눌러쓴  샌들을 신고 뒷산에 올라가 봅니다. 운동화를 신고 가야 하는데 왠지 샌들을 테스트해 보고 싶어 집니다. 이것을 신고 여행을 떠나면 해변도 걸을 것이고 산길도 올라갈 것입니다. 10년이 다된 샌들인데 아직도 멀쩡하니 몇 년은 더 신을 것 같습니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 보니 벌써 학교나 직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눈에 띕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이 퍼드득 날아다니며 아침 노래를 불러 줍니다.


요즘은 짚거적으로 깔아 놓은 산길이 많아서 다니는데 훨씬 편해졌습니다.

아침 산길에 어쩌다 한두 명씩 사람을 마주치곤 하지만 내가 올라가는 시간에 내려오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부지런히 산길을 떠났던 입니다. 깜깜한 새벽에 집을 떠났구나, 추측해 봅니다.


어느 정도 산길을 올라가 보니 살짝 땀이 배고 숨이 가빠집니다. 숨이 거칠어졌지만 알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옵니다.

'아직은 내가 살아있고 건강하구나!', 희열을 느낍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합니다.

 몸은 정상입니다!


산 중턱의 벤치에 앉아 보니 저 멀리 서울 강북의 산이 보이고, 눈앞에는 123층 바벨탑(롯데월드타워)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뒤로는 숲이 보이는데 바람이 껏 몰아치니 나뭇잎과 가지들이 요란한 비명을 질러댑니다.


파도 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려옵니다.

밀물이 들이닥치는 것처럼 후드득후드득 우왕우왕 울어댑니다.

침엽수 활엽수 가릴 것 없이 춤을 춰댑니다.

이런 시간에는 새들도 조용합니다.


햇볕은 따사롭고 바람은 선선해졌는데 지금 기온이 14도 정도 된다고 알려 줍니다. 스마트폰 기능을 이용하여 클래식 음악을 들어 봅니다. 베버의 '사냥꾼의 합창'과,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귀를 즐겁게 합니다. 노래 따라 같이 흥얼거립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은 철봉에 매달려 보기도 하고 평행봉에 올라서기도 하고 허리 운동에 팔 굽혀 펴기도 하면서 몸을 풀고 있습니다. 그 대열에 동참해 보니 기분이 상쾌합니다.


피톤치드가 코와 입을 통해 들어와 허파를 꽉 차게 만들어주면 몸에서는 엔도르핀이 솟구칩니다.

오늘 하루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올라가면서 또 내려오면서 아직도 남아 있는 꽃들을 스마트폰으로 찍어봅니다. 오르막길에서 안 보였던 꽃들이 내리막길에 보이는 신기한 현상을 체험합니다.

장미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문과 울타리에 걸쳐 피어있고 아직도 빨간 자태를 내고 있지만, 이제는 완숙한 여인의 모습입니다.

산딸나무 꽃도 그 흰빛이 퇴색하기 시작합니다. 가을에는 꽃자리에 딸기 닮은 열매가 무성할 것입니다.


금계국이나 산수국도 피어 있습니다.

그 꽃들도 사진으로 담아 봅니다. 수십 장을 찍어보지만 건질 수 있는 사진은 열 장도 안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필름값이 안 드니 사진 찍는 건 무료입니다.


어제는 친구 부부가 저 머나먼 남쪽 섬 진도로 놀러 가서 세방낙조전망대에서 찍어 보내준 일몰 사진을 보았는데, 색감이 너무나 멋졌습니다.


그런데 아침 태양은 눈이 부셔서 사진으로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직접 바라볼 수가 없어 곁눈질만 해 봅니다.

집에 돌아와 보니 7시 반입니다.

오늘 하루도 상쾌하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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