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米壽)의 축복, 그리고 12월의 첫날
아버지의 생신
12월의 첫날,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미수(米壽), 즉 여든여덟 번째 생신을 맞이하신 아버지를 축하하러 가는 길이었다. 동이 트기도 전부터 준비를 마치고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세 시간의 운전 끝에 도착한 전주. 오랜만에 뵌 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셨고,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마침 동생과 예배를 마치고 나오셨는데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점심 메뉴는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는 비빔밥과 갈비탕이었다. 비빔밥과 전통 음식으로 유명한 '한국집'은 한옥마을 근처에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에 둘러앉아 맛있는 음식을 함께 나누며, 아버지의 건강에 감사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다른 일정을 앞당겨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참석한 막냇동생까지 모였다. 모처럼 삼 형제가 함께했던 소중한 순간이었다.
식사 후에는 꽃과 시, 그림으로 장식된 예쁜 카페로 이동했다. 은은한 도라지차와 대추차의 향이 카페를 가득 채웠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며 작은 생일 축하 파티가 이어졌다. 아버지를 위해 준비한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생일 노래를 부르는 순간,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듯했다. 아버지의 소원은 단순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건강하게, 너희들과 자주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간중간 아버지는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동생들과 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며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6.25를 겪으셨다. 6.25 시절 겪은 고생스러운 이야기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을 되새기며 전쟁통에 사라진 둘째 형님을 그리워하셨다.
4.19와 5.16을 겪으시며 천직인 교사생활에 매진하셨던 아버지. 전주 시내 학교는 자전거로 출퇴근하셨는데 정읍이나 진안으로 부임해서는 하루에 6번 갈아타는 버스로 통근하신 경험담도 들려주셨다. 어청도에서 근무하며 섬사람의 생활도 체험하셨다.
오로지 자식들 잘되기만 바라며 그 어떤 고생도 참으셨다. 그래도 우리 여섯 식구들이 같은 초등학교 동창생일 정도로, 전주시를 기반으로 홀로 그 힘든 교사 생활을 버텨내셨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시고도 자식들이 자기의 길로 나아가게끔 격려해 주시고 조언해 주셨다. 아버지는 우리들의 영원한 스승이시다.
돌아오는 길은 꽤나 막혔다. 5시간에 달하는 운전을 아내와 번갈아 나눠가며 분담했다. 동승한 둘째 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은 금세 흘렀다. 동생은 그동안의 오랜 한국 생활을 마무리 짓고 이번주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니 정말 다행스러웠다. 아버지의 기도와 끔찍이도 아들을 사랑하시는 힘으로 건강하게 귀국하게 되었다.
운전은 힘들었지만 어린 시절의 추억과 요즘 사는 이야기부터 앞으로의 계획까지, 차 안은 웃음과 대화로 가득했다.
운전 중에 차량연료가 바닥을 드러냈는데 주유소가 나타나지 않아 조마조마하던 아내의 조바심과 질책은 나를 당황케 했다. 미리 대비하지 않은 안이함을 반성하며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렇게 12시간에 걸친 일정이 끝나고 집에 도착했을 때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꽉 찬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미수(米壽)라는 특별한 날을 기념하며, 12월의 첫날을 밝게 열었다. 긴 하루였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추억과 따뜻함으로 가득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순간들이 더 많이 이어지길 바라며, 감사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 아침, 아버지께 늦은 안부를 전했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어제는 밤 9시에 귀가하느라 도착했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버지께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기뻤어요. 여동생이 같이 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막내가 합류해서 다행이었습니다. 이제 남은 12월을 잘 마무리하는 숙제가 남았지만, 아버지와 저도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보내면 되겠습니다. 24일에는 아버지의 손녀가 귀국하니 그때 한번 더 뵙도록 하겠습니다.
평안한 월요일 맞이하세요."
아버지의 답신은 이러했다.
"어제는 우리 아들 삼 형제가 모처럼 한자리에서 점심을 같이하는 사랑의 자리였네.
아범 심덕으로 이루어진 자리일세.
종일 운전도 하고 신경 써서 피곤할 거야.
여러 가지로 고맙네."
아버지, 건강백세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