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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에 가려진 얼굴

숫자 없이 사는 법은 있을까?

by 글사랑이 조동표

사람들은 숫자에 집착한다. 아니, 어쩌면 숫자 없이는 사는 법을 잊은 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숫자와 함께였다. 생일이라는 숫자로 삶이 시작되고, 나이라는 숫자로 성장의 기준이 정해졌다.


학교에 가면 학년과 반, 번호가 매겨지고, "어느 초등학교 몇 학년 몇 반 몇 번입니다"로 나를 소개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체계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어진다.


학생 때부터 핸드폰을 쓰게 되는데 통신사에서 각자 부여받은 숫자로 나의 고유함을 인증받게 된다. SNS 상의 의사소통 매개체는 개인 휴대전화의 번호가 식별 기준이다.


성인이 되어 주민등록증을 받으면 또 하나의 숫자인 주민등록번호가 나를 대표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학번이 생기고, 학점은 4.5 만점 중 몇 점이냐로 평가된다. 등수라는 숫자 역시 내 위치를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군대에 가면 군번이, 사회에 나와 직장을 잡으면 사번이 주어진다.


주민등록번호, 학번, 군번, 사번...

어느새 숫자가 내 정체성의 일부가 되어 있다.


월급날 통장에 찍힌 숫자는 늘 불만이지만 언젠가 뒷자리에 '0'이 하나 더 붙는 꿈을 안고 살아간다.


차를 사면 배기량 숫자에 따라 가격과 세금이 달라지고, 운전면허증에는 또 다른 번호가 붙는다.


아파트를 사면 몇 동 몇 호가 주소가 되고, 그 속엔 몇 평짜리인지가 은근히 드러난다.


요즘은 초등학생도 친구에게 묻는다. "너네 집 몇 평이야?", "아빠는 연봉이 얼마야?", "엄마 시계는 얼마짜리야?"

얼마냐는 질문, 이 모든 것이 숫자다.


그렇게 우리는 크고 작고,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자연스레 '비교'가 시작된다.


나는 남들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는가, 더 넓은 집에 사는가, 더 큰 차를 타는가. 이런 비교는 자존심을 자극하고, 때론 자격지심을 낳는다.


국무총리나 장관 청문회도 숫자 싸움이다.

급여, 재산, 통장 내역, 후원금, 생활비. 숫자라는 언어만 남고, 그 사람의 진심이나 철학은 밀려난다. 우리는 어느새 숫자로 사람을 재고, 숫자로 사람을 판단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나 역시 숫자 속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에 주산을 배우며 주판을 튕겼다. 급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1급을 넘기 위해, 암산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빠르고 정확하게 더하고 빼고 곱하고 나누는 것이 자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숫자에 익숙해진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숫자는 질서를 만들지만, 동시에 사람을 틀에 가두기도 한다.


기업을 운영하면 매출과 성장률, 순이익 같은 숫자를 놓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종종 되묻는다.

이 숫자에 가려진 사람들의 얼굴을 내가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성과는 숫자로 말할 수 있지만, 가치와 철학은 숫자로 잴 수 없다.

좋은 조직은 숫자만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숫자보다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부르려 한다.


퇴근하면 지하철 몇 호선인지, 어느 지점에서 타야 하는지, 약속 시간에 늦을지 숫자를 보고, 몇 시 몇 분 도착인지 앱으로 확인하며 간다.


흔들리는 전철 속에서 통장 잔고는 얼마인지, 오늘 주식과 가상화폐, 펀드 수익률을 따지는 것도 숫자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숫자에 둘러싸인 세상.

숫자의 시대 속에, 이름으로 기억되는 삶을 고민하는 어느 CEO의 성찰도, 바쁘게 움직이는 시간의 숫자 속에 점점 무뎌져만 간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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