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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부끄러워하는 시대를 지나며

한유(韓愈)의 사설(師說)

by 글사랑이 조동표

- 스승을 부끄러워하는 시대를 지나며


나는 누구에게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누구에게 배우고 있는가.

무더운 여름날, 한유(韓愈)의 고전 '사설(師說)'을 다시 읽으며 문득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는 말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아닌데, 누가 의혹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스승을 찾는 일은 인간으로서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스승을 갖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배움을 숨기고, 배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감추려 한다.


한유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도(道)를 스승으로 삼는 것이니, 어찌 나이를 따지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따진다.

그가 나보다 어리면 마음속으로 깔보거나,

그가 나보다 지위가 낮으면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심지어는 '배운다'는 말이 ‘못난 사람의 고백’처럼 들리는 시대다.


한유는 그것이 미혹(迷惑)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는 좋은 스승을 찾아주려 애쓰면서, 정작 자신은 더 이상 배우지 않으려 한다.

책을 읽는 법은 알려주지만, 왜 배워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배워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혹은 그것을 이미 알았다고 착각한다.


무당도, 의원도, 악사도, 온갖 종류의 장인(匠人)도 스승을 둔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에 비해, 학문이나 삶의 지혜를 배우는 일에는 사람들이 왜 이리 체면과 자존심을 앞세우는지 모르겠다.

그 체면이 과연 무엇을 지켜줄 수 있을까.

스승 없이도 다 안다고 여기는 그 자존심은 과연 진짜 나를 성장시키는가.


한유는 공자 이야기를 꺼낸다.

“세 사람이 동행하면 그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

가르침이란 나이도, 지위도, 신분도 초월하는 일이다.

삶의 도(道)가 담긴 곳이라면 어디든 그것이 곧 배움의 장소이고, 그곳에는 스승이 있는 것이다.


나는 때때로 멘토링을 하면서 나보다 어린 대학생들에게도 배운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책이나 예술작품을 통해 선현들의 지혜를 빌린다.

그때마다 자존심은 잠시 내려놓고, 조용히 듣고 질문하며 되묻는다.

‘나는 얼마나 더 배울 수 있을까?’


그 질문을 할 수 있는 용기, 그것이 어쩌면 진짜 배움의 시작이 아닐까.

이제 우리는 스승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를 다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나보다 먼저 도(道)를 듣고 깨달은 이가 있다면, 그는 나의 스승이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에게 고개 숙여 배운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인간으로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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