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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기의 기술, 당근의 인연

팔면서 배우는 인생의 단면들

by 글사랑이 조동표

비우기의 기술, 당근의 인연

- 팔면서 배우는 인생의 단면들


올해 나는 생활 지침으로 ‘비우기와 버리기’를 정했다.

머릿속의 불필요한 생각을 비우는 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물건을 비우는 일에 집중했다.

내 주변에 쌓여 있는 것들을 나누거나 싸게 판매하며, ‘가짐의 무게’를 덜어내는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즐거운 비우기의 통로가 바로 '당근마켓'이었다.

오래전부터 가입해 꾸준히 이용해 왔는데,

가끔은 나에게 쓸모없어진 물건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 꽤 짭짤한 재미를 주었다.

사무실 비품부터 생활용품까지, 합리적인 가격에 사고팔며 비움이 단순한 ‘정리’가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을 깨닫곤 했다.


- 가을, 비우기의 계절


가을이 오자 본격적인 ‘정리 시즌’이 시작됐다.

시계, 가방, 구두, 볼펜...

내 손에 머물러 있던 아끼던 물건들을 차례로 내놓았다.

옷가지와 모자, 지갑과 안경테도 올렸지만 반응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그래도 시계와 가방, 구두, 볼펜은 연이어 팔렸다.

나의 전략은, 비슷한 중고품 가격이나 AI가 제시한 값보다 30프로 정도 올려서 내놓고 흥정을 하는 방법이다.


모자 하나는 2,000원 차이로 거래가 불발되었지만, 그 덕분에 흥정의 묘미도 새삼 느꼈다.


시계는 주로 5년에서 10년 이상 된 것들이었다.

브랜드가 있는 것도 있었지만, 이미 나와 아들 손목에서는 떠난 것들이라 누군가에게 새 시간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었다.


- 시간의 주인을 바꾸다


어느 날은 30대 초반의 멋쟁이 청년이 외제차를 몰고 왔다.

약속한 시간보다 5분 일찍 도착해 깔끔하게 인사를 하고 시계를 손목에 차보더니 “너무 마음에 듭니다”라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예의 바른 태도와 밝은 미소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거래가 끝난 뒤 남긴 따뜻한 후기까지, 오랜만에 사람의 온기를 느낀 순간이었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또 다른 남자는 약속 시간보다 20분 늦게 나타나더니, 시계가 투박하다, 솔라에너지로 가는 것은 처음이다며 낙찰가에서 5,000원을 깎아달라고 버텼다.

나는 웃으며 “그럼 그냥 가시죠”라고 했다.

결국 그는 마지못한 듯한 표정으로 약속된 금액을 이체했다.

그 순간 돈을 깎는 일보다, 사람의 품격을 깎는 일이 더 손해라는 것을 느꼈다.


- 발끝의 미학, 구두 이야기


가방 거래는 순조로웠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호하는 미국 브랜드의 크로스백과 색감과 키링이 예쁜 여성용 백팩은 단번에 새 주인을 찾았다.


그런데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구두였다.

10년 전에 샀지만 거의 신지 않아 상태가 괜찮은 구두들을 내놓았다.


한 40대 남성이 찾아왔는데, 나보다 훨씬 키가 작았다.

그는 반바지를 입은 채 “멋쟁이 삼촌이 신던 구두네요”라며 웃었다.

투박한 발을 억지로 구두에 밀어 넣더니

“이거 너무 멋있어요. 혹시 다른 구두도 파세요?”라며 눈을 반짝였다.

결국 팔려고 올려놓은 또 다른 구두까지 두 켤레를 한꺼번에 사갔고, 나중에는 또 다른 구두 사진을 보여달라는 메시지까지 보내왔다.

그는 진정 ‘멋을 아는 사람’이었다.


- 펜 하나의 인연


서명용 수성볼펜 거래는 작은 감동이었다.

한 남성이 내놓은 가격에서 10% 흥정을 제안해 왔다. 고민 끝에 승낙했다. 거래 후 그는 “이 브랜드의 볼펜을 두 번이나 잃어버려서 꼭 다시 장만하고 싶었는데 너무 감사하다. 너무나 착한 가격이고 상태도 좋다”라고 했다.

그의 진심이 전해졌고, 최고의 후기를 남겨주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에 또 다른 사람이 같은 볼펜을 보고 “제값에 살게요”라며 연락을 해왔다.

나는 이미 '판매 완료'가 되었다고 하자 그는 울상 짓는 이모티콘을 보내왔다.

“꼭 갖고 싶었는데요 ㅠㅠ ”

뒤늦게 찾아온 인연의 타이밍에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그 또한 거래의 묘미가 아닐까.


- 천태만상, 그러나 결국은 ‘나누는 마음’


당근마켓을 통하여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30대 젊은이부터 60대 중년까지, 모두가 각자의 이유로 거래를 하며 실속을 챙긴다.

그 안에는 나눔의 기쁨, 합리의 미학, 사람 냄새나는 소통이 있다.


나 역시 그 과정에서 ‘비운다’는 것이 단순히 없애는 일이 아니라, 나눔으로 채워지는 과정임을 배웠다.


오늘 밤에도 나는 책상 서랍을 열어본다.

‘혹시 또 비울 게 있을까?’

그건 단순히 물건을 버리는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의 먼지를 털어내는 작은 의식처럼 느껴진다.


- 에필로그


비우는 사람은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사람은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자유로워진 사람만이 다시 누군가를 따뜻하게 채워줄 수 있다.


올해 나의 ‘비우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 끝에는 아마, 더 단정해진 나 자신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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