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사업부와 글로벌 사업부
강남역 미아 4장 2화
- 아시아 사업부와 글로벌 사업부
서울의 겨울은 숨이 차도록 차가웠다.
강남역을 나서면서, 그는 옷깃을 여민 채 목적 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눈길이 미끄러웠지만 스스로를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몇 년 전 중국에서 돌아왔을 때와 비교해, 그의 내면은 말갛게 비어 있었다.
그는 북경과 천진을 기반으로 세운 기존 수액제 조직을 떠나 상해에서 치료약 전문 회사를 세우고 귀국했다.
아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아시아 사업부’가 막 본사에서 가동된 시점이었다.
여기서 아시아 사업부와 글로벌 사업부를 들여다보자.
2000년에 오너의 지시에 따라 분리된 아시아 사업부 조직은, 아시아 각국 지사들을 통괄하고 체계적인 운영을 꾀하는 글로벌 중추였다.
거기에 더해 2004년에 신설된 서울의 글로벌 사업부는 아시아 사업부의 한국 본부였다.
아시아 전역의 약사(藥事) 업무와 마케팅을 맡는 관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탈출하여, 전문 치료약 5 품목 PMM(Product Marketing Manager: 제품 마케팅 책임자) 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한국과 중국 지사에서 영업·마케팅을 경험했던 그는 이 조직에서 ‘허리’ 역할을 맡았다.
현실은 빈틈없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본사가 그를 중국에서 불러들인 뒤, 연봉은 3년 전으로 회귀했고, 직급이나 권한도 묘하게 축소되었다.
한국인으로서 본사의 명을 받아 해외 지사에 파견된 1호였던 그가 받는 건 최소한의 월급뿐이었다. 초라했다.
그의 아내는 고통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에도 가족을 위해, 학교에 배정된 아이들을 위해, 부부는 새로운 집과 삶에 천천히 적응해야 했다.
저녁 없는 샐러리맨으로 다시 태어난 그는, 묵묵히 회장 옆을 지켰다.
회장은 본래 미국 비즈니스를 위해 오너가 영입한 인물이었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미국 시민권자였으며 영어와 일어에 능통했다. 미국에 유학하고 신시내티 대학 연구실을 거쳐 유명 제약기업에서 일했다.
오너는 미국 진출을 위해 도와줄 사람을 찾던 중,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을 영입하였다. 그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면서 오너의 구상을 도와 본사의 미국 진출을 도와주고 있었다.
오너는 원래 한국인인 회장을 서울의 지사로 불러들였다. 당시 회장은 이미 60세를 넘은 나이였지만 미국 생활을 오래 하여 현대적인 감각의 소유자였다.
한국 지사에 옹립하여 젊은 직원들을 이끌어주는 부회장 역할을 부여하였다.
그러다 서울에 또 다른 글로벌 사업부를 발족시키고, 이 신생 법인의 경영을 부탁했다. 미국식 유전자를 젊고 우수한 한국인들에게 이식하여 장차 아시아를 위한 글로벌 인재 육성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그는 이미 한국 지사에서 회장의 도움을 받아 신약의 성공을 이루어낸 인연이 있었다. 주요 대학병원에 신약이 들어가도록 회장이 다리를 놓아주었다. 신약의 연구개발에는 회장의 인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
병원장이나 의료원장, 의대 학장 중에는 직간접적으로 미국 유학 시에 회장의 도움을 받은 이들이 꽤 많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에서 미국 유학은 큰 벼슬이었다. 중국에 해귀족이 있듯, 한국 의료에도 미국 유학파가 주류를 장악하고 있었다. 미국의 첨단의료는 한국의 의료발전에 기여한 바가 컸다.
글로벌 사업부 조직은 아직 돛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게다가 75세 회장과 직원들 사이의 현격한 연령차와 문화적인 간극은 현해탄만큼 넓었다.
회장은 조력자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너는 이 조직에 어쩔 수 없이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마침 귀국한 그에게 맡기기 적합한 쿠션 역할이 부여되었다. 회색지대였다.
거물도 아니고 피라미도 아닌 적당한 역할.
노련한 회장은 이 틈을 파고들었다.
오너의 지시로 그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다는 말을 흘리며 꼼짝 못 하게 그의 목줄을 죄었다.
그는, '자기가 모른다는 걸 아는 게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고 느끼며 자세를 낮추었다.
그런 환경 하에서 그는 때때로 조직의 머리가 되었고, 때로는 허리, 때로는 발 역할을 도맡았다. 그러나 뜨거운 가슴만큼은 깊숙이 감추고 살았다.
점점 그의 다양한 경험과 능력을 고려한 북 치고 장구치고 식의 특별 임무가 맡겨졌다.
때로는 그림자였고, 때로는 돌격부대가 되었으며, 때로는 통솔력을 발휘해야 했다.
마케팅, 학술, 의약품 부작용 보고, 기획, 총무, 인사, 재무, 무역, 대외업무, IT, Compliance, Annual Report, 주주총회, 비서실까지 두루두루 그의 손을 거쳐 밖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경영자 수업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땜빵으로 사용되는 소방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일은 그가 해냈지만 공은 회장의 몫이었다.
그는 회장의 권력 유지를 지탱하는 소모품에 불과한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회장의 놀이터였고 그는 꼭두각시였다.
그의 처지를 두고 회장에게 반항도 해보았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절대권력자는 늘 술과 밥을 사줘 가며 그를 얼르고 달랬다.
그는 점점 술의 노예가 되어갔다.
강남역 근처의 빌딩 숲 사이로 출근하는 날들이 반복되며, 그의 내면에는 묘한 불편함과 함께 이상야릇한 그리움이 스며들었다.
가끔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이 떠올랐다.
온몸에 상처를 입고 다시 전장에 서야 했던 장군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그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현실에 순응하기로 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직장인의 운명 아니겠는가.” 스스로를 설득하며 밤거리의 가로등 아래를 걸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언제나 질문이 도사리고 있었다.
퇴사의 유혹. 자유를 향한 갈망. 그리고 아직 이루지 못한 무언가를 향한 불확실한 희망. 복잡한 내면이었다.
문득 오너실 옆의 추상화를 떠올렸다.
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평범한 직장인의 삶을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여전히 무언가 해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 시절, 헤드헌터들이 그의 귀에 은밀히 속삭였다.
국내 굴지의 기업과 미국 기업에서 임원직을 제안받았지만 마음이 끌리지 않았다.
또 다른 제안은 중국 현지 근무였는데, 과거의 기억이 생생해지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결국 그는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또다시 중국에서 생고생하고 싶지 않다.’ 또한, '자신이 진짜로 가치를 발휘할 곳이 이곳에 있다'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굴지의 국내 기업 면접 자리에 갔을 때 일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거대한 오너 회장실을 마주했다. 한 층을 다 쓰는 화려한 방, 넘쳐나는 상장과 트로피, 대형 초상화, 모든 것이 성공의 상징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진짜 자신이 원하는 삶의 무대인지 의문이 들었다.
냉정하게 빛나는 그 큰 공간은 오히려 이질감을 일으켰다.
본사의 실용적이고 검소한 오너실과 오버랩되면서 현기증이 밀려왔다. 일본의 오너는 매출이 20배도 더 컸지만 사용하는 방 크기는 1/20도 안 되었다.
화려하고 겉을 드러내는 한국과, 검소하고 속을 감추는 일본의 차이였을까?
밖에 나오다 우연히 예전 회사에 같이 있었던 부장 출신과 마주쳤다. 근처에서 같이 커피를 마시는데 한마디 툭 튀어나왔다.
"형님, 그냥 거기 계세요. 여기는 치열하다 못해 피가 말립니다. 아마 반년도 못 견딜 겁니다."
그는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강남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가 선택한 글로벌 사업부는, 외부에서 영입된 이들과 내부 출신이 뒤섞인 복잡한 구조였다. 그 속에서 그는 ‘나 홀로 해결사’가 되어야만 했다. 글로벌 기업의 장점과 시스템을 흡수해 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직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사의 아시아 사업부는 막 세계를 향해 돛을 펴려 하고 있었다.
분야별 Regional meeting, 글로벌 콘퍼런스, 수십 개 국가의 책임자 회의...
매 기회는 발표와 성취와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바쁘게 움직였고, 어느새 중국에서 보냈던 날들이 아득한 옛 기억처럼 느껴졌다. 간간히 글로벌 미팅에서 마주치는 중국 지사 총경리들을 통해 돌아가는 소식만 듣고 있었다.
가끔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중국 노래를 듣는 순간, 잔잔한 추억이 마음에 스며들곤 했다.
그는 자신에게 묻곤 하였다.
‘나는 누구이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강남역의 미아처럼, 그의 방향은 아직 완전히 정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의 여정은 곧 이 도시와 이 조직의 이야기에 닿아 있었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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