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계절
강남역 미아 제2부 2장 9화
- 평가의 계절
1. 숫자가 사람을 부른다
11월이 되자 회사 공기가 달라졌다.
이메일 제목이 바뀌었다.
• 연간 목표 정렬
• KPI 확정
• 평가 지침 안내
그는 매년 보던 메일을 다시 읽었다.
내용은 늘 같았지만 의미는 해마다 달랐다.
평소 회사는 책임을 흐린다.
하지만 평가 시즌이 되면 반드시 한 사람 한 사람을 무대 위로 올려 책임을 묻는다.
성과는 조직의 것이라 말하고,
평가는 개인의 것이라 적는다.
2. 시스템의 얼굴
본사에서 화상회의를 개최했다.
화면 속 아시아 사업부장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발언은 결코 웃고 있지 않았다.
“올해는 '글로벌 기준'에 맞추겠습니다.”
'글로벌 기준'.
그 말이 나오면 의미는 하나를 가리켰다.
현지 사정은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미.
회의가 끝난 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질문자는 곧 대상자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3. 협의의 의미
그의 팀에서 한 명의 이름이 올라왔다.
실적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이 조직에서 튀지 않는 사람은 보호받지 못한다.
인사팀장이 말했다.
“위에서 '조정'이 들어올 것 같습니다.”
'조정'.
이 회사에서 가장 많이 쓰이지만,
아무도 정의하지 않는 단어였다.
4. 결정되는 사람
며칠 뒤, 본사에서 메일이 왔다.
• 평가 결과 협의 완료
협의라는 단어가 붙은 순간 이미 끝난 것이다.
그의 팀원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했다.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불렀다.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짧은 면담이 끝났고,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충격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미 예상한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도 부하에게 평가받는 다면평가가 의식되어 그녀에게 더 친절하게 설명하는 모습을 발견하고 실소를 머금었다.
5. 책임의 위치
퇴근 후, 그는 빈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결재는 시스템이 했고 평가는 본사가 했다.
그러나 설명은 자신이 해야 했다.
그는 오래전에 깨달았어야 했다.
권한은 위에 있고 책임은 아래에 있다.
항상 조직은 그것으로 유지된다.
6. 살아남는 방식
그날 밤 그는 인사 파일을 다시 열었다.
좋은 상사는 부하를 보호하는 사람이라고 믿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회사는 보호하는 사람보다 설득하는 사람을 오래 남긴다.
누군가를 지키려 하면 함께 사라지고, 누군가를 이해시키면 혼자 남는다.
7. 다음 자리
며칠 뒤, 인사 공지가 떴다.
누군가는 이동했고 그 누군가는 남았다.
그리고 그의 자리도 바뀌지 않았다.
승진도 좌천도 아니었다.
가장 회사다운 결과였다.
'변화 없음'.
중국에서 귀국 후 18년 동안 그 자리 그대로였다.
8. 남는 사람의 조건
퇴근길 강남역은 여전히 붐볐다.
사람들은 회사를 옮기고 회사는 사람을 바꾼다.
하지만 조직에는 늘 같은 종류의 사람이 남는다.
결정을 내리지 않지만, 결정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이 회사가 원하는 건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역할에 가장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미지: 네이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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