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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Jan 21. 2024

21

5

공연의 여운을 가슴속에 가득 품고 우리는 물고기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길을 따라 수족관으로 향했다. 기분이 좋았다. 극장에서 끝내주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기분. 왼편으로 찰랑대는 바다가 보였다. 시선을 위로 옮겼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하늘이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고래가 뛰어노는 푸르른 바다. 고개를 돌렸다. 나리가 보였다. 그녀는 주변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감상했다. 그녀는 예뻤다. 나는 조금 천천히 걷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을 되도록 오래 감상하고 싶었다.


매표소에는 대기열이 조금 있었다. 기다림 끝에 전시관에 입장할 수 있었다. 입구부터 조명이 어둑어둑했다. 나리는 입구에서 팸플릿 하나를 챙기더니, 터널을 지나며 그걸 열심히 읽었다.


“눈 나빠져.”


“응, 곧 집어넣을 거야.”


내 걱정에 나리가 대답했다. 걸어 갈수록 주변이 더 어두워졌다. 통로의 끝에서는 희미한 푸른 조명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츄라우미 수족관은 심해 여행관과, 산호초 여행관, 그리고 쿠로시오 여행관, 총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앞 코스에 위치한 심해 여행관에서는 평소 보기 힘든 심해어들을 많이 구경할 수 있다. 더듬이에 불이 들어오는 종류의 물고기들 말이다. 솔직하게 그렇게 잘 생긴 친구들은 없었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운 심해에서 이성을 볼 때는 위모가 우선순위가 아닐 테니까.


심해관이 끝이 났다. 조금 짧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점은 주최 측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원래 모든 공연은 메인이벤트에 가장 힘을 쏟아야 하는 법이니까. 다시 한번 통로가 나타났다. 이번 길은 아까보다 조금 더 길었다. 나리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쉬는 시간 중학교 교실에서 느낄 수 있는 소란스러움이었다. 터널의 끝에서 시작된 소리는 나갈 곳을 찾지 못한 채 통로에서 메아리처럼 진동했다. 나리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거의 다 왔어.”


눈썹을 잔뜩 오므린 채로 나리가 말했다.


“쿠로시오 관.”


여행지를 찾아보던 그날, 나리가 나에게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검푸른 빛으로 가득 찬 수족관 사진이었다. 3층은 되어 보이는 높은 층고를 가진 스튜디오의 한 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수조, 그리고 그 속에서 유유히 헤엄치는 커다란 생물체와, 그것을 향해 고정된 관객들의 고개.


터널을 빠져나온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사진에서 본 모든 것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내 발 밑으로 쭉 펼쳐진 계단식 관람석과, 저 멀리 보이는 푸른 빛깔의 스크린. 관람석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장난치는 아이들과,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두려는 부모들. 수조 가까이에서 함께 사진을 찍는 젊은 남녀들과, 조금 멀리서 두 손을 꼭 맞잡은 채 서 있는 노년의 커플들까지. 모두가 아름다운 장면을 구성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글바글했다. 나는 나리의 손을 꼭 잡고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갔다. H, G, F 열부터 C, B, A까지. 커다란 수조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3층이 뭐야, 4층은 되겠는데.”


나는 나리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좋아하는 배우를 보러 온 관객처럼 신나 했다.


“앞으로 가자.”


나리가 나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운이 참 좋았다. 우리가 쿠로시오 관에 도착했을 때가 마침 고래상어들의 식사시간이었던 것이다. 다이버들이 수조 속에서 헤엄치며 교통정리를 했고, 수면 위에서는 보트를 탄 사육사들이 먹이를 내려보냈다. 고래들 몇몇은 차례를 기다리는 듯 천천히 주변을 헤엄쳤고, 몇몇은 열심히 먹이를 먹었다. 그들은 수면 아래에서 일자로 몸을 세운 뒤, 사육사들이 주는 음식을 입속으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실로 위대했다. 우리보다 몇 십배는 거대한 생물체의 식사를 지켜보는 것은 아바타에서 나비족을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신비롭고, 이질적인 경험이었다. 3마리가 수조의 중앙과 좌우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곧추선 그들의 모습은 바다라는 신전을 지탱하는 3개의 기둥같이 보였다.  


목이 아파왔다. 한참을 멍하니 그들을 올려다본 탓이었다. 어느새 나는 수조에 매우 가까이 서 있었다. 옆에는 나리가 있었다. 그녀도 마천루를 처음 마주한 시골 아이처럼 고래를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나리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바닷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리의 뒤로 물고기 떼가 지나갔다. 구름처럼 한 무리를 이루어 지나갔다. 인어공주가 생각났다.


‘이것 좀 봐. 신기하지. 아름답고 신기한 것 바라보면, 넌 이렇게 말할걸. 내가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것 같겠지.’


OST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굳이 인어공주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나리가 내 앞에 있었다. 그녀의 몸은 어느새 나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 너무 예쁘다…. 파란빛을 만져 보고 싶어.”


그녀가 속삭였다. 생각보다 우리는 매우 가까이 있었다. 나리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순간이 있다. 유튜브의 가장 많이 본 순간처럼, 무언가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기억나는 것들. 예를 들어보자. 음악 하면 나는 U2의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이 글래스톤베리 상공에 울려 퍼지는 장면을 떠올리고, 나리는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흘러나오는 드라마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영화의 경우엔 나는 쇼생크 탈출의 앤디가 교도소 방송실에서 클래식을 감상하는 장면을 떠올리고, 나리는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터널에서 서로 마주 보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때가 그랬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에서 본 장면이 생각났다. 아니, 드라마였던가.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 장소에, 바닷속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드는 바로 그 장소에,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게 중요했다. 함께 돌고래의 재롱을 보고, 함께 고래상어를 구경하는, 바로 그것 말이다.


취한 듯 머리가 몽롱해졌다. 이 기분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나리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세 번 입을 뻐끔거렸다. 나리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맞춘 채 가만히 있더니, 입을 열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섯 번 움직였다. 주변의 소음 탓에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구태여 다시 말해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대답을 그 어떤 말보다 정확하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 나는 우리가 정확히 어떤 곳을 갔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국제거리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고, 나라에서 어떤 체험을 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별로 슬프지는 않았다. 커다란 아름다움을 마음속에 담아두려다 보면, 다른 기억은 조금 흐릿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때 그 수족관의 분위기와, 푸른빛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모습, 그리고 우리가 느낀 감정. 그것만 기억할 수 있다면 나에게 다른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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