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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Jan 2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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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었다. 몸도 깨끗이 닦았다. 침대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몸을 그대로 매트리스에 던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은 약속이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의 약속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나만의 동굴로 도망쳤다. 친구와 가족, 지인 모두가 나를 찾으려 했지만 나는 세상 밖으로 나오기를 거부했다. 계절이 두번 변하고 모두가 나를 포기했을 무렵,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에게 닿았다. 호열이었다. ‘괜찮아지고 있어.’ 짧은 통화의 마지막은 그랬다.


실제로 나는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었다. 상처가 아물어 가는게 느껴졌다. 시간이 약이야. 모두가 말했고, 스스로도 되뇌었지만 공허하기만 했던 그 말이 실감났다. 아직도 가끔씩 네 생각이 나곤 하지만 더 이상 가슴 한쪽 편이 아프지는 않았다.


이 사실이 나를 조금 울적하게 만들기도 한다. 덤덤해졌다는 건 이젠 너와 함께한 모든 것들이 정말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는 선언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어쩌겠어. 우리는 이별했고, 시간은 흐르는 것을. 한 때 하나의 세상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너를 이제는 정말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잘 차려 입고 나와.”


수화기 너머로 들린 호열이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나는 괜히 콧방귀를 켰다. ‘내가 뭐하러?’ 그러면서 내가 좋아하는 자주색 티셔츠를 집어들었다. 통이 큰 베이지 카고 바지에 목이 긴 흰양말을 신었다. 신발은 반스로 갈까? 좋은 생각이야. 제주도에서 샀던 팔찌도 찼다. 탄생석이 들어가 있는 내가 애정하는 팔찌. 실로 오랜만의 외출에 나는 신이 났다. 끝으로 샤넬 옴므 스포츠. 마지막으로 향기를 입고 나는 현관을 나섰다.




하루는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 근처 카페에서 딴짓을 하던 나는 휴대폰의 진동에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너무 빨랐다. 괜한 걱정이 들었다. 몇주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녀가 지원한 기업의 최종 합격 발표날이었다. 나 또한 매우 긴장된 상태로 일상을 보냈다. 그날 정확히 이맘때쯤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고,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탈락했다고 했다. 허탈함을 애써 감추려 반음정도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때의 기억이 오늘의 나를 덮쳐왔다. 같은 일이 반복되어선 안된다고 기도하며 전화를 받았다. 내가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수화기 너머로 나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합격했어!”


나는 그 누구보다도 기뻤다. 아마 그날 나와 같은 카페에 있었던 사람들은 내가 조금 문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혼자 자리에서 펄떡거리는 20대 중반의 남자는 누가보더라도 수상할만 했을테니. 하지만 취업을 위해 그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을 아는 나에겐 다른사람의 시선 같은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인생이란 참으로 오묘하다. 그토록 염원했던 나리의 취업이 우리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 신호탄이 되었으니. 입사를 한 뒤로 나리는 바빠졌다. 원래도 바빴지만 더욱 바빠졌다. 입사교육이다 뭐다 회사에서는 나리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회사원이라는게 그런건가보다. 생각을 하며 나는 학기를 보냈다.


처음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퇴근하고 나를 보러 오는 너의 모습이나, 너를 보기 위해 회사 앞을 찾아가는 내 모습이 전부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갑자기 걸려오는 클라이언트의 전화나, 야근으로 인한 약속 취소에도 나는 크게 서운하지 않았다. 그냥 너의 회사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돌아 오는 일 또한 너와 나눌 수 있는 사소한 이야기거리라고 생각이 되었으니까.


정확히 어느 시점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어느 순간 나는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와 다름 없었던 우리 둘의 세계가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종유석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한방울 한방울씩 그렇게 우리의 세계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입 회사원인 너와, 학생이자 취준생이었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도 달랐다.


나는 이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한번 머리속에 자리잡은 생각은 곰팡이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잊어보려 했지만 네가 업무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팀 동료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할 때, 그럴때마다 나는 매번 우리 사이의 간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는 너의 이야기를 하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은 마치 서로가 다른 언어로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어느샌가 다툼이 잦아졌다. 대부분의 문제는 나로 인해 발생했다. 어엿한 사회인이 된 너를 보며 나는 존경과 질투, 부러움과 열등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감정은 겉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여기서 멈춰야해. 내 어깨를 붙잡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지만, 나는 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쪼그라든 내 자아 탓인지 자존심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나는 사소한 일에도 자존심을 세웠고, 당당해야 할 순간에는 겁쟁이가 되었다. 그런 내 모습에 너는 실망했고, 나는 실망한 너의 모습에 상처를 받았다. 너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했던 순간들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마다 상처와 분노로 뒤덮힌 너의 모습을 보는 건 나에게 고통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고통이 나에게 이유 모를 희열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하지만 나는 그 시간을 단 한가지 희망으로 견뎌왔다. 내가 취직을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그런 믿음. 지금의 다툼은 스쳐지나가는 순간과 같을거라는, 우리는 다시 예전처럼 하나가 될 수 있을거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그래서 너는 나의 취업 소식에 누구보다도 더욱 기뻐했던 걸테지. 너의 취업에 기뻐했던 나처럼, 너는 온몸으로 나를 위해 기뻐해 주었지.


‘오늘 하루 화이팅!’


처음으로 출근 하는 날, 네가 보낸 짧은 문자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던지. 덕분에 나는 힘찬 목소리로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단순히 취업의 기쁨 때문만은 아니었다. 비로소 우리의 세계가 다시 하나가 되었다는 행복. 그 동안의 다툼은 이제 안녕이라고, 오해와 갈등은 우리의 신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거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오래된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말이다.




실연을 표현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론이 있다. 반쪽이 사라진 기분이라든지, 심장이 나뉘어 지는 고통을 겪고 있다든지, 아니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다든지. 내 기분은 그들 중 어느 것과도 비슷하지 않았다. 나에게 이별은 썰물과 같았다. 만조의 바다를 기억하는 나에게 앞으로 너의 바다는 이것 뿐이라고 말하는, 그런 것 말이다. 잠시 고개 돌리면 어느샌가 사라져버린 채, 텅 비어버리는 그런 것.


그날은 보통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고, 비몽사몽한 채로 몸을 씻고, 셔츠와 슬랙스를 다려 입고 출근을 하는 그런 날. 기지개를 펴면서 흘깃 쳐다본 휴대폰에는 너의 잘자라는 메세지가 와 있었고, 나도 졸린 눈을 비비며 좋은 아침이라고 문자를 보낸 그런 날이었다.


그 날은 회사에서 유난스럽게 바빴다. 생각지 못한 곳에 문제가 터져 프로젝트는 평소와 달리 삐걱거렸고, 모두가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다행스럽게도 일은 원만하게 해결이 되었다. 팀장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해결이 된거죠?”


“네, 화주 측에서 서류를 최종 수정해서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팀원의 대답에 팀장님은 한숨돌렸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마치고 팀원들끼리 한잔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나도 참가하고 싶었지만 선약이 있었다.


“아, 나리씨?”


그들은 나와 나리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왔고 모두 짐을 쌌다. 데이트 잘 하고 오라는 팀원들의 인사에 화답하며 정문을 빠져나왔다. 나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회사 마쳤어.’ 얼마 있지 않아 그녀의 답장이 왔다. 토독토독. 나는 답장을 보냈다. ‘곧 데리러 갈게.’ 얼마있지 않아 휴대전화의 진동이 울렸다. ’아니야, 내가 갈게.‘ 알겠다고 답장했다. 나는 머리를 갸우뚱했다. 그녀가 온다는 말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순전한 나의 감이었다. 한 사람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온전한 감.


나는 회사 근처 카페에서 나리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뒤 도착했다.


“안녕.”


우리는 간단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이동했다. 규동을 먹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메뉴였다. 밥을 다 먹고 산책을 했다. 회사 근처에 꽤나 이쁜 공원이 있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길을 걸었다. 평범한 데이트였다.


한참을 걷다, 우리는 멈춰섰다. 그녀가 멈춰섰다. 나리의 손이 천천히 내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나는 손끝으로부터 전해져오는 상실감에 고개를 돌렸다. 나리는 몇 마디의 말을 했다. 나도 대답했다. 그리고 정적. 흐느낌 소리에 침묵은 깨지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전화도, 문자도, 아무것도. 그녀 생각이 날 때면 전화라도 걸어볼까. 헛된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건 끝이 났다는 걸.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우리는 이미 끝나 버린 한 편의 영화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 그 점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쎈 척이 아니라, 그 순간에는 정말로 그 방법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이별을 선고받는 순간에도,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나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받아들이는 것 외엔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날 회사에서는 전날의 회식 이야기로 수다가 한창이었다.


“데이트 잘 하고 왔어요?”


“네.”


동료들의 물음에 목소리가 내 목을 지나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입으로만 미소 지으며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오늘 따라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지금 나는 뭘 하고 있는 걸까. 목 놓아 무언가를 외치고 싶으나, 그 누구에게도 결국 호소하지 못하는 이 불쾌함. 미칠것 같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내가 식사를 거른다고 하니 모두가 놀라워했다. 동료들은 나를 두고 식당으로 향했다.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 불이 꺼졌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업무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머리가 계속 아파왔고, 속이 자꾸 울렁거렸다. 퇴근을 하고서도 증상은 계속되었다. 집에 도착해서 밥을 좀 먹어보려 했지만 넘어가지 않았다. 나는 병자처럼 비틀대며 침대로 향했다. 그냥 누워있고 싶었다. 천장을 보며 누워있다 몸을 돌렸다. 창가 너머로 검은 하늘이 보였다.


나는 밤하늘의 별을 참 좋아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별은 지구의 사람들만큼 존재한다고 말씀해 주신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별을 가지고 있고, 별과 함께 생애를 보낸다고. 나는 그 말을 참 좋아했다.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것 중 하나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면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만의 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이 이야기를 너에게 해준 적이 있었다. 너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지.


“우리 별은 어디에 있을까?”


유난히 반짝이던 별을 가리키며 너는…. 배게가 축축했다. 눈물이 조금 고이더니, 흘러내렸다. 울음이 터져나왔다. 감정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슬픔에 중독된 채 눈물을 흘렸다. 참으려했지만 울음소리는 점차 높아져갔다. 내 방, 나만의 공간 그 가운데에서 나는 더이상 볼 수 없는 너와, 더이상 나눌수 없는 너와의 대화를 생각하며 울었다. 슬픔이 파도가 되어 내 방을 잠식 할 때 까지 나는 목이 터져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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