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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Feb 0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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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과 금요일의 환상적인 조합으로 지하철에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약속장소를 찾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가게 앞에서 시간을 확인했다. 다행히 늦지 않았다. 문을 열었다.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대화소리가 겹겹이 내 귓속으로 들어왔다. 고깃집은 만원이었다. 나는 호열이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잘 지냈냐?”


녀석을 발견하고 나는 웃으며 테이블에 다가갔다. 호열이의 얼굴에도 웃음이 번졌다. 호열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맞잡았다. 어깨를 한번 부딪히고, 그리고 눈빛으로도 인사했다. 호열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녀석의 맞은편에는 남주가 있었다. 남주와도 같은 동작을 했다. 녀석은 여전히 키가 컸다. 테이블에는 둘 외에도 사람이 더 있었다. 남주의 옆에 있는 여성분과, 호열이의 옆에 있는 또 다른 여성 분 하나.


“오랜만이야.”


유리가 웃으며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이지?”


이호열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에서 어린 시절의 일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남주, 호열이, 유리…. 그리고 나리.


호열이는 유리와 곧 1주년이 된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뭘 하면 좋을지 함께 고민 중이야.”


나는 아무 내색 않고 축하의 말을 전했다. 호열이 녀석의 표정은 꿈속을 사는 듯 몽롱했다. 남주도 축하를 거들었다.


“그런데 너희들 왜 나한테는 축하한다고 안 해?”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유리가 물었다.


“왜냐면 너는 사람을 잘못 골랐으니까.”


내 말에 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리는 웃음을 터트렸고, 호열이는 볼멘소리를 냈다.


“내가 어때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와, 잔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뒤섞여 내 귀를 때렸다. 남주 옆의 여성분은 남주의 여자친구였다. 예전에 함께 식사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름이 기억이 나질 않았다. 슬쩍 남주에게 물어보니 녀석은 그때랑은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이름이 기억나질 않아 당황스러웠는데 다행이었다.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도 화답했다. 그녀의 이름은 서형이었다. 성은 물어보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조그마한 펍을 방문했다. ‘Good Town’이라는, 호열이가 자주 오는 펍이라고 했다. ’Good Town’ 은 분위기가 꽤나 좋았다. 허리에서 머리까지 정도 되는 크기의 창문이 거리를 따라 크게 나 있었고, 철제 테이블 몇 개와, 바에서 볼 수 있는 기다란 테이블이 보였다. 벽지는 흰색으로 마감했으며, 하단부는 자단색 목재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벽에 걸린 그림과 구석에 마련된 밴드 세션은 펍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키고 있었다.


호열이의 친분 덕분인지 우리는 꽤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녀석은 주문을 한다는 핑계로 바텐더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말이 참 많아.”


유리가 호열이를 보며 중얼거렸다.


“처음엔 되게 과묵한 줄 알았거든.”


“너를 좋아했으니까. 머리가 하얘져서 말을 못 했던 거지. 그리고 저게 녀석의 매력이잖아. 언제 누구와도 친해질 수 있는 저 성격.”  


내 대답에 유리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한데…. “


각각 다른 술이 담긴 5개의 잔과 함께 호열이는 돌아왔다. 우리는 잔을 부딪혔다. 청명한 소리가 났다. 잠시 후 목을 타고 뜨거운 게 흘러들어왔고, 정신이 또렸해졌다.


“네 분 다 어릴 때부터 알던 사이라면서요?”


술이 조금 들어가자 서형 씨가 질문을 던졌다. 그녀와 남주는 서로의 방향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나가 되고 싶은 듯 보였다. 둘은 저 팔걸이를 없애버리고 싶겠지. 나는 멍하니 그 둘을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호열이가 나를 슬쩍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학창 시절에 전부 같은 학원을 다녔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다시 모인 게 얼마나 신기한지 몰라.”


남주가 말을 받았다. 서형 씨가 중간중간 질문을 했고, 남주와 호열이가 대답을 했다. 나와 유리는 대체로 듣는 쪽이었다.


펍에서 우리는 꽤나 마셔댔다. 각자 술을 끝냈을 즈음, 남주가 일어서더니 테킬라 샷을 들고 나타났다. 우리는 테이블을 두드리며 분위기를 고조시켰고, 돌아가며 한 명씩 샷을 입에 털어 넣었다. 우리는 샷을 마신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박장대소했다. 어디서 들고 왔는지 호열이가 라임과 소금을 건넸다.


“자, 뭐라고? 청바지야. 알겠지? 청춘은! 바로! 지금!”


호열이가 소리쳤다. 우리는 야유와 웃음이 반쯤 섞인 소리를 내며 술을 목구멍으로 던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주와 서형 씨가 비틀거리며 자리를 떴다. 내일 아침 일찍 가야 하는 곳이 있다고 했다.


“일정은 우리도 있는데.”


호열이가 둘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유리는 호열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조그마한 펍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임에 올 때 타고 온 지하철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주로 스탠딩 바 쪽에 모여 있었다. 노래에 집중했다. Metro Boomin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우아한 바이올린 선율에 얹어진 베이스와 보컬. 귓속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과 어우러진 남성의 독백. 나는 비트에 맞춰 고개를 까딱 거렸다.


펍에 오면 좋은 점이 있다. 사람 구경을 원 없이 하게 된다는 것. 스탠딩 바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자기만의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있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여자와 남자가 함께 있기도, 남자들만, 아니면 여자들만 있는 테이블도 있었다. 여자 셋이서 온 테이블이 보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 명이 낯이 익었다. 누군지 고민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 호열이는 유리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을 별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베이스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뭘 그렇게 쳐다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호열이가 스탠딩 바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저기 청바지에 검정 터틀넥 입은 사람.”


호열이와 유리의 고개가 함께 내가 눈짓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쳐다보고 있다고 광고를 해라 아주 그냥.


“예쁜데? 저 사람이 왜?”


호열이가 정색하며 말했다.


“아는 얼굴 같아서 그래. 근데 어디서 본 사이인지 기억이 안 나.”


내가 곁눈질을 하며 대답했다.


“아는 사이가 아니라 알아가고 싶은 사이 아냐?”


호열이가 이죽거렸다.


“대화를 좀 해봐.”


나와 호열이가 투닥거리는 걸 무시한 채 유리가 말을 보탰다. 나는 당황했다. 어디서 봤는지 기억도 안나는 사람에게 말을 걸라고? 그녀는 내 표정을 읽더니, 굉장히 쉬운 문제를 조카에게 가르쳐주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가서 말이나 걸어 보라고. 아는 사람이라며. 어떤 이유로든 저 사람이 너의 기억 속에 남았다는 건, 네가 저분을 인상 깊게 생각했다는 거잖아. “


틀린 말이 하나 없었다. 나는 다시 검은 터틀넥의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스탠딩 테이블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길이 들킬까,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그런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언의 압박 속에서 나는 고민했다. 말을 걸라고? 모르는 사람에게? 사실 모르는 사람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그녀는 나를 알기는 할까? 머릿속에서 수많은 물음이 스쳐 지나갔다. 무엇하나 나 스스로 답을 얻기 힘든 것들이었다. 해답을 얻는 방법은 간단했다.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맞은편에 있는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좇는 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사람들 틈에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도 나를 계속 바라봤다. 곧장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와 그녀의 일행들은 이야기를 멈추고 나를 함께 쳐다보았다.


“오랜만이네요.”


예상치 못한 단어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의아함과 놀라움이 섞인 기분이 들던 찰나, 나는 알아차렸다.


“이제 영영 안 오는 거예요?”


그녀는 나리의 회사 근처 카페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회사를 찾아가는 날이면 항상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곤 했다. 나는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하루는 그녀가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날씨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안 추워요?”   


“제가 시원한 걸 좋아해서.”


내 대답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그 외에 그녀와 별다른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었다. 매번 초인종 소리와 함께 카페를 들어서면, “어서 오세요!” 밝은 그녀의 외침과, 주문하려 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죠?” 알고 있다는 듯한 물음. 거기에 동의를 표하는 다양한 나의 대답. 이게 그녀와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우리는 제법 서로에게 가까이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머리가 짧았다. 살짝 웨이브를 준 단발머리와 그녀의 까만 눈동자는 반짝 빛이 났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흔들거렸다. 매끄러운 피부, 오뚝한 코, 그리고 도톰한 입술은 푸른빛 조명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뤘다.


“여기서 뭐해요? 이 늦은 시간에.”


괜히 마음과는 다른 소리를 했다. 몇 가닥 흘러나온 앞머리 사이로 그녀의 매끈한 이마가 보였다.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서요. 아까 같이 있던 분들은 집에 갔나 봐요? “


“맞아요. 먼저 일어났죠.”


“커플 모임인가 봐요?”


그녀가 물었다. 조명 색깔이 바뀌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맺힌 내가 보였다.


“여자친구는 어디 갔어요? 나랑 이야기하는 거 보면 혼날 것 같은데.”


“헤어졌어요.”


침묵이 우리를 감쌌다.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괜한 걸 물었다는 생각을 하나보다.


“미안해요. 내가 괜히….”


“괜찮아요. 시간이 꽤 지났는걸요.”.


침묵이 다시 한번 찾아왔다. 주제를 바꾸고 싶었다. 그녀도 같은 마음이었나 보다.


“시간 나면 카페 한번 들러요. 여름을 맞아서 새로 단장을 좀 했거든요.”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곳에서 마셨던 라테가 생각났다. 매번 아이스 아메리카노만을 마시던 나에게 하루는 그녀가 제안을 했다. 자기가 만든 라테가 참 맛있다고, 한번 마셔보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은 얼음을 동동 띄운 라테를 마시며 나리를 기다렸다. 라테를 보더니 나리는 깜짝 놀라 했지. 카페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다른 메뉴를 개발했다고 했다. 요새 그 메뉴가 제일 잘 나간다고. 정신이 없다고 했다. 나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라테도 참 맛있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웃었다.


“언제까지 놀 건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곧 들어가려고요. 요새는 늦게까지 놀지는 못하겠어요. “


“몇 살이나 먹었다고 벌써 그래요? 몇 살이에요? “


“먼저 말해줘요.”


“내가 먼저 물었는데요. ”


투닥거리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더 어렸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분명 그녀가 나보다 훨씬 어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업도 내 예상을 빗나갔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시는 분인줄 알았는데, 알바가 아니라 사장님이었던 것이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자 그녀는 웃으며 머리를 짚었다. 그녀는 자신을 어리게 보는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래도 키가 있는데….”


그녀가 볼멘소리를 했다. 실제로 그녀는 키가 꽤 컸다. 나는 어려 보이는 건 좋은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만들더니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중얼거렸다. 위로하는 말 몇 마디를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힘들었다. 그녀의 일행 두 명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 있었던 탓에 나는 이쯤 하기로 마음먹었다.


“저기 테이블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녀도 비슷한 눈치를 받았는지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도 오랜만에 만난 거라서요. 재미있게 놀아요. “


돌아선 내 등 뒤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 카페 한 번 들러요. “


나는 고개를 끄덕하고, 다시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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