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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에 털썩 앉았다. 내 앞의 둘은 열심히 눈빛을 교환하더니, 유리가 호열이를 어깨로 툭 하고 쳤다. 호열이는 자동반사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더니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뭘 어떻게 돼. 아는 사람 맞아서 이야기 좀 하고 왔지.”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 사장이었어. 난 종업원인줄 알았는데, 사장이라고 그러더라고. 너무 어리게 보여서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사실 우리랑 나이 차이가 별로 안나더라. 겨우 한 살 차이야.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리게 보이진 않거든? 키도 있고. 근데 왜 어리다고 생각을 했을까. 분위기가 좀 발랄해 보이는 면이 있어서 그랬나 봐…. 왜 그래?”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는 그들을 보며 나는 말을 멈췄다. 유리가 번호를 교환했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유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럼 카페에 다시 가 볼 생각은 있어?”
그녀가 워낙 천천히 말을 한 탓에, 나는 이것이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잠시 헷갈렸다. 유치원생에게 점심시간이 되어야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는 걸 알려주듯 말하는 유리의 표정과 목소리에 나는 혼이 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호열이라고 크게 다른 건 없었다. 녀석도 혼이 없는 눈빛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불쑥 물었다.
“혹시, 저분이 별로 맘에 안 들었어?”
“응? 아니,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하는 일에 열정이 있는 것도 그렇고, 저 나이에 가게를 꾸려 나가는 것도 그렇고.”
내 대답에 호열이는 기계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초점을 잃은 채 음악에 맞춰 고개를 까딱거리더니, 갑자기 생기가 돌아온 눈빛으로 말했다.
“한 잔 더 할까?”
잠시 후, 유리가 술자리에 제동을 걸었다. 나도 유리에게 힘을 보탰다. 이미 시간이 꽤 늦었다. 우리는 이만하고 자리를 파하기로 했다.
“인사 안 해도 돼?”
호열이가 넌지시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테이블 쪽을 열심히 훑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가버렸나? 인사도 없이? 서운해졌다. 어이가 없었다. 언제부터 인사하는 사이였다고? 그렇게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인거지. 씁쓸하게 혼자서 생각을 마무리 지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간 거 같아.”
호열이도 내 대답을 듣고는 두리번거렸다.
“화장실 갔을 수도 있잖아. 어, 저기 그분 친구 같은데? “
“됐어, 그냥 가자.”
나는 호열이를 잡아끌고 펍을 나왔다. 잠시 후, 유리도 우리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지하철 타고 갈 거지?”
호열이가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리며 물었다.
“서두르면 막차는 탈 수 있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의 하루는 평범하다. 자명종 소리에 잠을 깨고, 피로한 눈을 감으며 잠자리에 들고. 그 사이 남겨지는 추억이란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매일이 반복된다. 대부분의 날은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이라는 여정에 큰 변칙점을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끔씩, 돌아보면 가끔씩 그런 날이 있다. 지나고 보면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던, 커다란 이정표와 같은 역할을 했던 그런 날. 평범한 하루, 그 속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사건. 일곱 살, 오 월의 한 봄날이 그랬다. 열다섯 살의 겨울이 그랬고, 스물한 살의 가을이 그랬다.
작은 사건 하나가 온 우주의 법칙을 바꿔버릴 수도 있다. 나비효과. 그 미세한 변화. 자그마한 파동이 우리의 세계를 흔든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런 것이다. 네가 나에게 말을 걸어주고, 네가 나에게 도시락을 건넸던 것처럼. 그때의 우리가 앞으로 각자의 삶에 큰 버팀목이 되어주기로 했던 것처럼.
나는 지금까지 우리는 운명으로 엮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오늘로써 한 가지 우주의 법칙을 깨달았다. 운명이라는 건 거짓말이다. 모든 것은 우연일 뿐이다. 반복되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얘들아 잠깐만.”
조금 앞에서 걸어가던 둘은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리둥절한 호열이의 표정과, 반대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유리의 표정. 나는 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둘이 먼저 가. 오늘 재미있었어.”
혼란스러워하는 호열이의 표정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 가게로 향했다. 시간이 없었다. 유리가 잘 설명해 줄 거야. 확신이 들었다. 펍을 향해 걸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더니, 어느 순간 달음박질이 되었다. 호흡은 그렇게 가쁘지 않았다. 심장은 쿵쾅거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를 살지 않는다. 걱정하며 미래를 살거나, 후회하며 과거를 산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나도 그랬다. 현실에 충실하지 못했고 언제나 변명과 후회로만 일관했다. 신기했던 건 다른 누구도 내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관심이 없었던 것일지도.
그 순간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에는 나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나만이 나의 우주를 바꿀 수 있다는 걸. 그래서 더 이상은 걱정하고 후회하지 않겠노라고, 내 생각과 감정에 충실한 오늘을 살겠노라고 다짐했던 것이다.
“집에 안 가요?”
나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시간이 늦어서 이제 들어가려고요.”
그녀가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 조금만 더 늦게 들어갈래요?”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조명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나는 한번 더 힘주어 말했다.
“나랑 좀 걸을까요?”
그녀는 당황한 듯 보였다.
“음, 제가 내일 일찍 일이 있어서….”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봐요.”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몸을 돌렸다.
“잠시만요.”
그 순간 그녀가 나를 불렀다.
“그렇게 해요. 근데 너무 오래는 못 있어요. 나 진짜 내일 아침에 일이 있거든요.”
나는 그 자리에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그녀의 말을 소화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몇 초가 흐르고 내 입가에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모습을 보며 웃었다.
“여긴 너무 시끄러운 것 같아요. 조용한 곳을 아는데, 거기로 가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펍에는 Post Malone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배웅했고, 나는 그녀를 기다렸다. 펍을 나왔다. 우리는 조금 걸었다. 거리에는 바람이 조금 불었다. 시원했다. 그녀의 이름은 수련이었다. 이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수련이라는 꽃이 참 이쁘다는 말을 했고, 그녀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우리의 목적지를 궁금해했다. 술집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지만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전봇대 근처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 몇몇과 술에 취해 서로를 안고 있는 커플 몇몇, 귀가 중인 것 같은 무리 몇몇이 보였다.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Good Town’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빛과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희미해졌다.
길을 따라 좌우로 올라가 있는 조그만 건물들과, 영업을 마친 더 작은 가게들, 그 앞에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는 쓰레기봉투들과, 그들을 뒤지는 길고양이의 안광이 보였다. 머리 위에서는 오래된 가로등이 생의 마지막 불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와 내 피부가 주황색으로 보였다.
골목길의 끝에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나는 슬쩍 그녀의 손목을 끌었다. 그녀는 잠깐 움찔하더니, 나를 따라 움직였다. 붉은색 벽돌 위에 크게 ‘Discotheque’이라고 적힌 가게에 도착했다. 그녀는 이곳이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네온사인이 빛을 내뿜는 입구가 보였다.
가게에서는 U2의 ‘Summer of Love’가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테이블 바 뒤편에 서 있는 인호에게 나는 인사했다. 녀석은 깜짝 놀란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았다. 분명히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겠지. 하지만 녀석은 아무 말도 않고 우리를 안내했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인호에게 나는 작게 고개를 까닥했고, 곧이어 녀석도 고개를 까딱 했다. 우리의 사인은 그걸로 충분했다.
우리는 조그마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나처럼 진토닉을 시켰다. 곧이어 인호가 술을 내왔다. 잔을 부딪히고 한 모금을 입에 담았다. 그녀와 눈이 맞았다. 그녀의 커다란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그 모습에 나도 따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