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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Feb 18.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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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 나는 글을 쓰기 전에 대개 결말을 어느 정도 구상해 두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못했다.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통 감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글을 써 내려가다 보니,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생겼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게 지냈답니다.’와 같은 마무리보다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최근에 나의 짧은 이야기에 나온 공간들을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유적지가 된 뒷산과, 호수가 있는 놀이동산과, 동창회를 했던 술집과, 마지막으로 이야기에 등장했던 펍. 당산은 아름답게 변했다. 유적 발굴작업이 끝나고 그곳에는 공원이 만들어졌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생활했던 촌락을 복원하고, 주변에는 그 시절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산 중턱에는 생활 체육시설이 들어왔고, 초입에는 호수와 잔디밭이 조성되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주말 오후에 당산을 찾으면, 많은 사람들이 잔디밭에서 나들이를 즐기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어린이 대공원은 새 단장을 통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놀이동산은 시설 노후화로 인해 철거되었고, 그곳에는 대신 놀이터와 휴게공간이 만들어졌다. 호수 근처의 도보가 정비되었고, 녹지 사이로 길이 놓였다. 도심 속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이제 가족과 연인들로 가득하다.


술집은 한참 동안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나, 영원하지는 못했다. 도시의 성장과 함께 상권이 이동했다. 술집이 넘쳐나던 거리는 이제는 개인 카페 몇몇 만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간판이 내려갔고, 그곳에는 임대 광고가 붙었다.


펍은 정확히 반대로 상권의 수혜를 입었다. 우리들만의 거리였던 그곳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전국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쓰레기봉투만 간간이 보이던 그 거리는 이제 밤이나 낮이나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가득해졌다. 신기했던 건, 손님의 숫자에 비례해서 인호의 걱정도 날로 늘어갔다는 점이다. 가게를 이전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매출보다 임대료가 더욱 가파르게 늘어난 탓이라고 했다. 북적이는 가게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참 이상했다.


가끔씩 그런 질문을 받는다. 내가 기억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장소들을 마주할 때마다 어떤 감정이 드는지. 실망한다거나 울적해지지는 않는지. 그런 감정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으려 한다. 왜냐하면 내가 받아들이건 말건, 모든 건 변하기 때문이다.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 다시금 찾아왔다. 뱌아흐로 완연한 봄. 나는 하루를 마치고 귀가했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나는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너무도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쿠쿠에서는 쌀밥이 20분 뒤 완성된다는 안내와 함께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밥 짓는 냄새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인덕션 위에서 끓고 있는 국은 보글보글 소리를 더했다. 나는 슬쩍 뚜껑을 열었다. 붉은빛의 쇠고깃국이 보였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발코니로 향했다.


창은 이미 열려있었다. 그곳에서 불어온 바람이 내 얼굴에 닿았다. 실내 공기와는 조금 다른 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발코니에 조그마한 테이블과 의자를 마련해 두었다. 날이 좋아지면 바깥의 공기를 마시며 독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반쯤 읽은 책을 덮어둔 채 바깥을 구경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꼰 다리 위로, 턱을 괴고 있는 손바닥 위로, 그녀의 눈동자는 별빛을 담은 듯 빛이 났다. 그녀는 창백한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내 인기척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다녀왔어?”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다가가 그녀를 껴안았다.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 나는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그녀는 자그마하게 웃었다.


“벌써 밤이 됐네.”


“그것도 되게 늦은 밤.”


“바람이 살살 부는 게 기분이 너무 좋아. 여기서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


그녀가 시선을 다시 밖으로 돌리며 말했다. 밤하늘에는 달이 크게 걸려 있었다. 덕분에 밤이 참 밝았다. 달빛에 그녀의 얼굴이 반사되어 빛났다. 나는 난간에 가까이 다가갔다. 달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호주머니 속 동전이 잘그락거렸다. 등 뒤로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몸이 다가와 내 가슴을 감쌌다.


“들어갈까?”


내 제안에 그녀는 말없이 나를 더 세게 껴안았다. 나는 그녀의 팔을 풀어냈다. 몸을 돌렸다. 그녀를 마주 보고, 눈을 마주친 채로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랑 같은 말을 했다.


매일 밤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온 것이 있다. 삶은 많은 좌절을 필요로 한다. 많은 순간 그 점을 느꼈고, 이미 여러 번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 억울할 때도 있었다. 왜 인생은 한번뿐인 것일까. 실패와 잘못을 바로 잡을 수는 없는 걸까. 삶이 새싹으로 피어난 시절부터, 푸르르고 높게 자라나던 시절에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야기는 결국 결말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의해 평가받는다. 끝이 좋았는가, 아름다웠는가, 즐거웠는가.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결말을 위한 시행착오라면, 그렇다면 그다지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녀는 나를 이끌고 거실로 향했다. 집에 맛있는 냄새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녀는 부엌으로 가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천천히 걸었다. 그녀는 문을 열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나는 정말이냐는 표정을 지었고, 그녀는 웃으며 나를 방 안으로 끌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팔을 타고 올라와 내 목을 만졌다. 그녀는 곧장 팔을 내 목에 걸었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도 눈을 감았다. 서로의 입술이 부딪혔고, 우리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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