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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Jan 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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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에 가면 고래와 함께 스노클링을 할 수 있대.”


나리가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노트북의 푸른빛이 비쳤다.


“칸쿤? 멕시코에 있는 도시 아니야?”


“맞아….”


나리는 내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계속해서 노트북을 두드렸다. 책상 의자에 쪼그려 앉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고양이 같았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오키나와에서는 고래상어를 볼 수 있대. 수족관이 엄청 커서 여러 마리가 헤엄치는 모습이랑 밥을 먹는 모습도 볼 수 있다는데?”


나는 나리를 뒤에서 안으며 그녀 얼굴에 내 얼굴을 밀착시켰다. 우리는 함께 노트북에 떠있는 글을 읽었다.


‘오키나와의 신비를 그대로, 수족관에서는 신비로 가득 찬 오키나와 생물들의 웅대한 세계가 펼쳐집니다….‘


나는 원래 고래라는 생물을 참 좋아했다. 언제부터였냐 하면 어린 시절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 어린이 판을 읽었을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2학년이 읽기에는 분명 어려운 소설이었을 테지만, 모비딕 어린이판은 사실 글이라기보다는 삽화 모음집에 조금 더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젠가 한번 고래를 실제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책을 덮으며 나는 황홀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책에 묘사된 고래 모비딕의 모습은 실로 경외스러웠다. 옆에서 나리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녀가 나의 말에 동의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리도 고래를 참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고래라는 생명체가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날 우리는 수업보다는 각자의 공책에 고래를 그리는 데 집중했다. 더 멋진 고래를 그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초콜릿우유를 가지기로 내기했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우리는 각자의 고래에 한 표를 행사함으로써, 결국 누구의 고래가 끝내주는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멕시코를 가고 싶었다. 고래와 함께 수영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생이었고, 그 정도의 여유를 가지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오키나와에 가기로 했다.


“아가미가 있고 없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커다란 생명체를 가까이서 본다는 게 중요한 거야.”


나리를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타면 돼.”


내가 구글 지도를 한번 더 확인하고 말했다. 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볼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그녀도 이 순간을 기대하고 있었구나. 나도 모르게 씩 웃음이 나왔다. 고래를 볼 생각에 들떠있는 그녀의 모습은 아기처럼 순수해 보였다.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버스에 올랐다. 한 시간 남짓 달렸을까, 수족관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수족관으로 향하는 큰길이 보였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양 갈래로 길이 나누어졌는데, 오른쪽은 수족관으로 가는 길이었고, 왼쪽은 야외 공연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우리는 왼쪽 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고래상어를 보기 전 우리는 돌고래 쇼를 관람하기로 했다.


쇼는 야외 공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았던지 공연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단위 관광객들이 많았다. 꼬마 시절 부모님을 졸라 해운대 수족관을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일본인들 사이를 지나 적당히 목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나리가 설레어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재잘거렸다.


“저기 봐, 공연장이 엄청 커. 사람들도 엄청 많아, 다들 일본인일까? 우리만 한국인일 수도 있어. 사육사들 입고 있는 옷 너무 귀엽다.”


어느새 공연 시간이 다가왔다. 누군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 사람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실없는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어로 했다. 나는 처음에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청중들의 반응을 통해 그가 진행자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을 따라 웃고, 박수를 쳤다. 바람잡이를 바라보다 가끔씩 나와 나리는 눈이 마주쳤고, 그때마다 우리는 공연과는 전혀 상관없는 웃음이 터지곤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열변을 토하는 사회자의 모습에 내가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 왠지 모르게 미안해질 때쯤, 주변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곧 쇼가 시작될 모양이었다. 진행자가 무언가 말을 했고, 관중들은 다 같이 손뼉을 쳤다. 우리도 따라서 손뼉을 쳤다. 어리둥절하게 있는 나에게 나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돌고래가 나오는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게 어떻게 일본어를 알아들었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녀는 나에게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다시 공연에 집중했다.


나는 ‘007 시리즈’를 참 좋아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아름다운 오프닝 시퀀스 때문이다. 아델과 샘 스미스의 노래를 들으며 총 포신 안의 제임스 본드를 마주하면, 그 자체로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돌고래 쇼의 도입부 또한 비슷했다. 공연장이 삽시간에 조용해지더니, 사회자가 내려가고 사육사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들은 단체로 인사했다. 그러고 일본어로 몇 마디를 하더니, 무대 앞에 위치한 풀장을 가리켰다. 모든 관객들의 눈길이 풀장의 잔잔한 수면으로 향했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물보라 소리가 들렸다. 물 위로 돌고래가 솟아올랐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가 순서대로 뛰어올랐다.


그들은 마치 덩크 콘테스트를 하듯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공중에서 다른 포즈를 취했다. 관중들은 열렬한 박수로 주인공들을 맞이했다. 짝짝 거리는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돌고래들은 수면 위로 얼굴을 드러낸 채 환호를 만끽하더니, 다시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 한 번은 좌에서 우로, 한 번은 우에서 좌로. 돌고래를 따라 물보라가 일었다. 관중들은 그 광경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정신을 놓은 채 돌고래들의 묘기를 관람했다. 다섯 마리의 돌고래는 정말 많은 것을 할 줄 알았다. 그들은 스타였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금세 공연은 막바지에 다라랐다. 마지막으로 돌고래들은 링을 통과하는 묘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육사들은 관중을 향해 소리를 높여달라 손짓했다. 환호소리가 높아졌다. 모두의 시선이 돌고래와 그 앞의 장애물로 모였다. 관중들은 피날레를 위해 환호를 멈추었다. 선수가 출발했다. 그는 수면아래서 미끈하게 헤엄치더니, 하늘로 솟아올랐다. 재기 넘치는 널뛰기, 그리고 착지. 풍덩. 수면에 일어난 물보라에 맞춰 청중은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공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모든 출연자들이 무대의 중앙으로 올라왔다. 돌고래 다섯 마리와 네 명의 사육사. 맨 왼쪽 사육사의 구호에 맞춰 그들은 청중에게 인사했다. 우레와 같은 환호가 그들을 덮쳤다. 그들은 환호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사이로 나는 나리에게 수족관에 오길 잘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곤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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