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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Jan 11.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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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의 양 볼은 술기운 때문인지 살짝 발그레 해져 있었고, 규리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본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긴장해서 굳은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고, 규리는 진품명품의 감정위원처럼 나를 한참 뜯어보았다. 나리도 규리와 함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불타는 마음과, 그 반대로 미친 듯이 얼어버린 몸을 가누는데 모든 힘을 쏟아붓느라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오랜만이야.”


나리가 나에게 인사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때 그녀와 눈이 맞았다. 그녀의 얼굴과 몸이 나의 반대편에서 웃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그녀에게 내 모든 초점이 향하더니, 그 밖의 다른 것들은 페이드아웃 되어 버렸다. 일순간 세상이 조용해졌고, 규리를 포함한 모든 동창들이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배경은 하얗게 변했고, 그 중앙에는 나리만이 보였다. 그녀는 학생때와 달리 길어진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환한 미소는 하얀 얼굴을 더욱더 밝게 만들었고, 그녀의 몸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인호가 다가와 나에게 인사했고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우리는 안부를 나누었다. 인호는 규리와도 반갑게 인사했다. 아주 외향적이었던 둘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매우 친한 사이였다.  규리가 인호에게 나리를 소개해주었고, 인호와 나리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른 애들도 진짜 오랜만에 보지? 빨리 인사하러 안 가고 뭐 하는 거야.”


나리와 가벼운 대화를 끝낸 인호가 나를 채근했다. 나는 녀석의 등쌀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러 이동했다. 동창들과 많은 이야기를 해지만, 그 어느 것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고깃집에서 나리와 눈을 마주친 순간 나의 모든 감각은 마비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계속 그 순간을 곱씹었다. 그녀의 인사에 화답조차 못한 나 자신이 너무나 바보 같다고 느꼈다.


시간이 자정에 다다라서야 모임은 끝이 났다. 다들 잘 가라는 인사와,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나누며 우리는 헤어졌다. 모두들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떴다. 2차를 가는 무리도 있었다. 나는 인호와 함께 친구들을 끝까지 배웅했다. 종규의 다음에 꼭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흩어졌다.


나는 끝내 나리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녀는 내가 제일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나, 역설적이게도 나는 그녀가 있는 테이블의 근처에도 다가가지 못했다. 저기 멀리 나리와 규리가 함께 걸어가는 게 보였다. 팔짱을 꼭 끼고 걸어가는 둘을 보며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지나가면 이젠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렇게 된다면 과연 나는 지금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더 이상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십 대 소년이 아니라는 생각과, 그녀 또한 더 이상 그 시절의 소녀가 아니라는 생각.


그 순간, 나는 마음을 결정했고, 인호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갑작스러운 내 인사에 녀석은 당황하며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할 말이 있다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남긴 채 녀석을 떠나 달렸다. 이미 꽤나 멀어져 버린 나리를 쫒기 위해 나는 열심히 달렸다. 순간 인호가 나를 보고 있는 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내가 거리를 꽤나 좁혔을 즈음, 내 인기척 때문에 규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성큼 다가온 내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렀고, 그녀의 비명소리에 나리도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깜짝 놀랐잖아!”


규리의 질책에 나는 숨을 고르며 미안하다는 말을 겨우 내뱉었다. 헐떡거리는 나에게 규리는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달려온 이유가 뭐야? 그냥 우릴 놀라게 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 테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리를 아직도 놀란 듯 눈이 동그래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구슬처럼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보자 내가 여기까지 달려온 이유가 더욱 또렷해졌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가슴을 내밀고, 턱을 높게 든 채,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멋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규리의 눈은 게슴츠레해졌고, 나리의 커다란 눈동자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한마디 더 얹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으나, 이내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나의 패는 모두 보여주었으니 상대의 패를 기다릴 차례였다. 나는 양손을 호주머니에 꽂은 채 멀리 보이는 빌딩을 쳐다보는 척했다. 그동안 규리는 나리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고, 나리는 그에 맞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나리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래, 그러자.’라든가, 아니면 ‘오늘은 안될 것 같아. 미안해.’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첫마디는 규리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다음에 봐.”


그녀는 나리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나리와 포옹을 하더니, 나에게 지은 미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


규리는 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나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그녀는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우리로부터 멀어졌다. 또각또각. 규리가 신은 구두 소리가 인적 없는 거리에 울려 퍼졌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호흡이 돌아온 지는 꽤 되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일하고 있었다. 나리를 마주하고자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나리도 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우리는 단 둘이 남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 당산에서, 십 대 시절 학원에서. 그때 이후로 처음 가진 우리만의 시간이었다. 머릿속에서 예전 내 행동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부끄러워졌다. 내가 한 말, 내가 한 행동, 모든 게 너무 서툴렀다.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얼굴은 타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여자 아이를 성가셔하는 꼬마도 아니었고, 용기가 없어하고 싶은 말도 하지 못하는 십 대 소년도 아니었다. 나는 이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지만, 나리의 눈동자를 마주했을 때 다시 한번 확신했다.


그녀도 많이 달라졌다. 어린 시절의 앳된 모습은 그녀의 얼굴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똑 단발이던 머리카락은 허리춤까지 내려왔고, 생머리 대신 은은한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속눈썹은 더 길어진 것 같았고 그녀의 입술은…. 붉은 복숭아 빛깔을 품고 있었다.


“잠시 걸을까?”


내 제안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인적 없는 시내를 걸었다. 가로등은 가로수를 비춰주고 있었고, 단풍잎은 조명에 맞춰 은은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바람은 선선히 불었다. 어떤 때는 살랑살랑 코를 간지럽히고 도망갔다가, 어떤 때는 청소꾼처럼 거리의 낙엽을 쓸어가기도 했다.


예전부터 그랬다. 나는 너에게 다가가고 싶었다. 봄날의 당산에서부터, 겨울철 호수가를 지나, 지금 낙엽 떨어지는 시내를 걷는 순간까지 그랬다. 예쁘다고 말하고 싶었고,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한번 더 당산에 올라 가자. 다시 한번 더 유원지에 놀러 가자. 그렇게 너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랬다면 너는 조그마한 끄덕임으로 나의 제안을 승낙했을 테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만의 감정선을 조금씩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의 어긋남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었다는 걸. 용기가 없어 한 발짝 내딛지 못한 나로 인해 너와 나의 인연은 이렇게 긴 시간을 다른 방향으로 진행해 왔다는 걸.


너를 만나러 가는 동안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나처럼 맑았고, 버스는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는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인지하지 못했지만, 오늘 고깃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너와 눈이 마주한 순간 나는 그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너는 나에게 그런 의미를 지닌 존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오늘만큼은 용기를 내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 비겁함에 내 마음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너에게 나는 얼마만큼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걸까.


정답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있을 터였다. 우리는 몇 블록을 더 걸었다. 대화가 필요했다. 나와 나리 말이다. 우리가 엇갈렸던 것과 그 이유에 대해 해야 할 이야기가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오늘 할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그냥 이렇게 걸으며 서로의 존재를 충분히 느낄 수만 있다면 충분했다.


사실 그날 밤에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그녀의 향기와 눈빛, 그리고 미친 듯이 쿵쾅대는 내 심장 정도일까. 그날 밤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새웠고, 다음날 아침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나리에게 톡을 보냈다. 너무나도 간단한 카톡 하나를 보내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고, 1분이 1년 같은 기다림 끝에 그녀의 답장을 받고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찾아왔다. 우리는 서로의 연인이 되었다. 나는 복학생으로서, 나리는 졸업반으로서 다음 학기를 준비했다. 알고 보니 우리는 같은 지역의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모든 게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느낌. 그녀와 나는 그랬다. 새 학기가 시작하고 우리는 대학생의 연애를 했다. 모든 게 여유롭지 못했다.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나리는 학업과 취업 공부를 병행하며 매일마다 책과 씨름하고 있었고, 나는…. 나는 열심히 다른 일들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했다.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힘들 수 있었지만 곁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 만으로 나는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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