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가 진실을 덮으면 불의천하가 된다.
세상만사가 안팎이 있듯이 외면의 사실과 내면의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 사실이고, 속에 감추어진 것을 의미라고 한다. 철학적으로는 현상과 본질, 역사학적으로는 事實과 史實로 구분하기도 한다. 안과 밖, 현상과 본질, 事實과 史實은 일치할 수도 있으나 같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세상사는 명실상부(名實相符)도 있지만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일이 허다하다. 대체로 외면의 현상은 직관적 · 감각적이고, 내면의 의미는 사고적 · 유추적이다. 또한 전자는 인간적 · 본능적이고, 후자는 이성적 · 사유적이라면 이 둘은 二分的 대립관계이다. 인간은 전자에 해당하는 지식을 바탕으로 후자에 해당하는 지혜를 쌓아왔으니 이것이 인류의 문화발전이요, 인간이 인간인 이유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식을 지혜로 발전시키는 노력보다는 알량한 지식을 이용하여 거짓으로 위장하기를 좋아한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보다는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反문화적이요, 非인간적인 행위이다. 말로는 민주주의 · 자유를 외치면서 하는 짓은 그와는 동떨어진 물신주의 · 개인주의 · 이기주의 풍조를 정당화하고 있다. 흔히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 개인주의를 혼동하는 일이 많지만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므로 개인주의 · 이기주의와는 전혀 다르고, 또한 소수의 자산가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 물신주의와도 다른 것이다. 우리는 사회주의라면 반사적으로 경기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지만 저들도 나름대로는 민주주의를 자칭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만 옳고, 저들은 그르다고 생각하는 독선자가 많다. 문제는 자본주의 · 개인주의가 민주주의의 본질인 것처럼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 시대는 문화발전이 아니라 퇴영의 시대이고, 인간이 아니라 동물적 사회이다.
요즈음 우리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 중의 하나가 팩트(Fact)다. 마치 모든 규정과 판단기준이 여기에 달려있는 듯하다. 팩트를 우리말로 하면 ‘사실’이고, 사실을 풀어 말하면 ‘객관적 · 직관적으로 드러난 현상’이다. 그리고 대개는 겉보다는 속이 더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런데도 걸핏하면 팩트를 내세우는 이유는 거짓과 가짜뉴스가 난무하기 때문이다. 허위와 '카더라'가 사실을 덮어버리고, 사실이 본질을 가린다면 정의는 사라지고, 인간은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이다. 현대문명의 첨단기술에 의해서 허위와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있는 현실은 인간의 사악한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AI, DP와 같은 인공지능기술과 유튜브는 인간을 철저하게 세뇌하고, 무기력하게 만든다. 정교하게 조작된 거짓과 허위로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갉아먹고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떠한 사실도 믿을 수 없는 불신의 사회가 되고, 본질 · 의미 · 정의 · 이성- 이런 것들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나라를 일시 빼앗겼다는 사실을 빌미로 해서 민족의 역사와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해괴한 사람들이 이 나라를 주무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史實은 실종되고, 事實마저도 모호하다. 事實은 팩트이지만 史實은 그 팩트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해석’이다. 나라를 빼앗겼던 역사는 사실이지만 그 事實을 극복하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투쟁과 새 역사를 창조한 것은 우리 역사의 고귀한 史實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친 선열들을 애국지사라 하여 존중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시적 비정상적인 事實을 빌미로 史實을 부정하는 자들이 오히려 순국선열들을 모욕하고, 득세하는 패역(悖逆)의 세상이 되었다. 어떤 이유로도 설명이 안 되는 미증유(未曾有)의 기막힌 역사퇴행이 벌어지고 있다.
한 해병 사병이 사단장의 부당한 처사로 희생당한 것은 팩트이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전투력을 약화시키고, 군 수뇌부의 부패 타락으로 국방을 위험하게 한 것은 사건의 본질이다. 그런 자들이 우리 군을 장악하고 있다면 군 기강은 무너지고, 우리 안보는 보장할 수 없기에 절대로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한 사병의 억울한 죽음의 사실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희생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더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정부는 이 역사적 본질을 관행적 사건으로 흘려버리고 있고, 야당과 국민은 억울한 죽음에만 매달려 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할 일은 그런 사실을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고발한 수사단장을 어이없이 항명죄로 몰아가고, 不義가 정의를 압살하는 기막힌 사실을 호도하는 언론과 정치인들, 그리고 민주시민의 가치관을 상실한 일부 소수의 국민들이다.
기후이변으로 지구촌은 전대미문의 재앙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기후이변으로 인한 재앙은 엄연한 팩트요, 사실이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어두운 위정자들은 이 엄중한 사실마저 외면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끔찍한 경고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는 기후이변의 원인인 탄소배출억제 주장을 인정하지 않거나 모른 척하고 있다. 현 정부는 전 정부에서 추진해 왔던 탄소억제책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범죄화하고, 재생에너지 정책을 속속 폐기하고 있다. 경제적 효율을 빌미로 핵발전으로의 회귀는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역사퇴행을 저지르는 짓이다.
영부인의 주가조작 사건과 명품수수 사건은 엄연한 팩트이다.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범죄가 분명한데 모른 척하는 것은 명백한 불공정이요, 검찰의 또 다른 범죄이다. 끊이지 않고 드러나는 국정농단과 비리를 묵인하는 것은 우리의 윤리적, 도덕적 타락을 불러와 필경 나라를 위험하게 할 것이다. 최고 통수권자와 그 가족의 국기문란과 비리가 밝혀지지 않는다면 본질은 고사하고 당연한 팩트마저 존재할 수 없는 不義한 사회가 될 것이다. 이제 누구한테 사기죄와 부패뇌물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이에 대한 각성 없이 여전히 팩트만을 입에 달고 사니 우리는 지금 가공할 팩트폭력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