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노인의 존엄

노인의 존엄은 목숨보다 귀하다.

by 김성수

노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어디 사람 마음대로 되는가?’ 맞는 말입니다.

설령 목숨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어도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도 죽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 수가 없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자기 목숨마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종교적, 윤리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목숨이 중요한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중요한가는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인간의 목숨이야 하늘이 준 것이라서 스스로 결정권이 없다고 하겠지만 인간의 존엄이야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은 모든 생물이라면 다 갖고 있는 흔한 목숨이 있어서가 아니라 인간만이 가진 존엄 때문일 것입니다. 만약 목숨과 존엄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존엄을 버릴 것이 아니라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릴 것을 하늘도 허락할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신앙을 버린 사람보다는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서 목숨은 물론 신앙까지 포기한 안중근 의사는 인간의 존엄을 가장 높인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데에는 목숨은 물론 영혼까지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숨과 영혼보다도 민족이 더 소중했기 때문에 순교가 아닌 殉國순국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는 제재를 받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입니다. 안의사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탄식만 하는 사람들은 너무 나약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죽고 사는 일이 마음대로 되나’를 되뇌이느니 이제는 ‘죽고 사는 일쯤이야’라고 대범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당장 죽으라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살 만큼 살았으니 사는 일에 너무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뜻입니다. '목숨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 가당찮은 요구 같지만 이미 ‘연명치료 거부’를 실천하는 노인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별스럽지 않아보여도 이것도 스스로 의미 없는 목숨에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을 높인 용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장수를 포기하거나 거부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장수에 집착하여 몸 보신과 병원을 무상출입하는 것보다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실천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입니다. 물론 병원을 들락거리는 노인들이 '오래 살자는 게 아니라 건강하자'라는 뜻은 이해가 되지만 결과적으로 오래 살자는 말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오래 살아 나의 생존권을 누리는 것보다 자식과 후손의 행복과 생존권을 지켜주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물론 서로의 생존권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구폭발, 노령화시대에 장수는 자칫 후손의 생존권을 침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걱정은 평범한 노인도 얼마든지 하는 일입니다. 자식이 고통을 받거나 말거나, 젊은이들이 싫어하거나 말거나 내 목숨 내가 사는데 누가 시비냐라고 말한다면 더불어 같이 말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을 과격하다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자고로 성현 선각자들이 이런 가르침을 수없이 해왔고, 실제로 이를 실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구태여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고, ‘죽을 때를 아는 사람’은 인생을 성공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존엄을 지키는 것은 삶과 죽음의 시기를 선택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 사회에, 국가에, 세계에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곧 의인이요, 의사요, 성인입니다. 그래서 長壽장수가 미덕이었던 옛날부터 壽則多辱수즉다욕이라고 했으니 노인이 적었던 옛날에도 오래 살면 좋은 일보다 욕된 일이 더 많았던 것입니다. 치욕을 당해가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의미 있는 죽음이 훨씬 가치 있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천박한 삶보다는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라는 의연한 자세가 품격이 있어 보입니다. 장수를 마치 인생의 승리자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추하게 오래 사느니 죽어서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일 것 같습니다. 아무리 장수시대라 해도 80 넘어서까지 심신이 건강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 중에 하나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산다는 것이 욕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장수하는 노인들은 대부분 욕으로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 욕이 자신의 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식, 자손에게 욕을 주는 것이라서 더 딱한 일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고 하지만 죽는 것도 여러 가지라서 자연사, 자살, 존엄사, 義死의사는 각기 그 품격이 다릅니다. 자연사야 구태여 인간이 아니라도 가능한 일이고, 자살도 불법이라서 구태여 따로 논의할 필요 없습니다. 존엄사를 두고 윤리적으로 논란이 많지만 인간의 편에서 생각한다면 개인의 권리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과 구차한 연명을 포기하는 존엄사와는 다를 것입니다. 인간이 비록 본인의 의지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살아왔다면 자신의 의지대로 죽을 권리도 주어야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義死는 사회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값진 죽음이라서 그 선택과 의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존엄사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구태여 자연사를 최선이라고 고집할 이유도 없을 것 같습니다. 짐승들도 자연사를 하므로 인간이 자랑할 일도 아닌 것 같은데 그것만이 정당한 것으로 말하는 일이 흔합니다. 자연사를 포기해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나는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인간의 존엄을 살린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나누어 준 의로운 삶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義士로서 지금도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살고 죽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나’라는 어정쩡한 삶보다는 훨씬 값진 삶을 산 것입니다. 의사나 존엄사가 죽음을 내 마음대로 결정했다고 해서 윤리적인 문제를 들이대지만 핑계만 대다가 자연사를 기다리는 사람보다 훨씬 값진 삶일 것 같습니다.


유행가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당당함도 좋지만 ‘내 나이가 이래서’라는 지각도 있어야 염치를 아는 노인일 것입니다. 나의 권리가 남에게 뻔뻔함으로 느껴진다면 사회의 장애물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염치를 안다면 최소한 치욕은 면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이런 염치없는 노인들을 ‘틀딱충’이라고 뒤에서 욕을 해댑니다. 그 뜻이 ‘틀니 끼고 딱딱거리기나 하는 버러지’라고 하니 그 지독한 욕설을 듣고도, 그러거나 말거나 ‘백세를 넘기 전에는 못 간다고 전해라’라고 버둥댄다면 참으로 염치없는 짓입니다. 치욕을 두려워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노인을 공경할 젊은이는 많지 않으니, 나이만을 내세우면서 노인도 몰라보는 패륜말세라고 탄식하기보다는 먼저 나잇값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해야 옳을 것입니다. 노령화사회, 인구절벽의 시대에 장수는 더 이상 권리도, 축복도 아니라 자칫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기 십상이라는 지각이 있어야 그나마 노인의 면목이 서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9988을 외치는 넉살보다는 언제든지 기꺼이 존엄사, 義死의사를 감행할 수 있는 염치 있는 노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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