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
강력한 힘을 필요로 하는 운동경기도 사실은 힘을 빼는 것이 가장 원숙한 경지라고 합니다. 힘을 빼야 몸이 부드러워지고, 몸이 부드러워져야 반응속도와 적응력이 높아지고, 힘을 효과적으로 집중시킬 수 있고, 그래서 오랫동안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힘을 쓰고 있으면 몸이 경직되고, 힘의 집중력이 떨어지면 가지고 있는 힘을 발휘하기 어렵고, 지구력도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집중력이 필요할수록 힘을 빼야 합니다. 힘을 뺄 줄 안다는 것은 힘을 줄 줄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힘을 뺀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힘이 강한 것을 이기는 것입니다. 물이 바위를 뚫고, 불이 쇠를 녹이고, 구름이 해를 가릴 수 있습니다. 형체도 없는 햇볕이 단단한 얼음을 녹이고, 사랑이 원한을 풀 수 있습니다. 그래서 道家에서는 유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움으로 단단함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儒家는 부드러운 仁으로써 法家의 단단한 法을 이겼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악착같은 법이 사랑의 인을 여지없이 억누르고 있습니다. 젊은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노년마저 그런다면 매사가 위험할 것 같습니다.
늙어지면 힘도 약해지거니와 신체도 굳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목을 곧게 세우고 어깨에 힘을 잔뜩 주는 노인이 많습니다. 허리가 꼿꼿한 노인은 보기에도 좋지만 목과 어깨가 빳빳한 노인은 강시나 진시황릉의 병마용 같아서 보기에도 어색합니다. 그렇게 굳어진 몸에 힘을 주다가는 정작 필요한 힘을 쓸 수도 없고, 골다공증 뼈는 부러지기 십상입니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힘의 원리는 노인에게 매우 고마운 일입니다. 어차피 노인은 강하지 못하니 부드러움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더구나 병들거나 건강하지 못한 노인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미 힘이 빠져 있으니 따로 힘을 쓰지 않아도 자연 무리할 일이 없어 좋을 것입니다. 이미 굳어진 뼈를 부드럽게 할 수는 없겠지만 경직된 사고는 얼마든지 유연하게 할 수 있습니다. 몸을 망치는 흥분제를 써서 힘을 과시하려 하지 말고, 욕심과 허세의 힘을 빼어서 사고의 부드러움을 연마해야 합니다. 욕심과 허세에 차 있으면 힘을 뺄 겨를이 없고, 긴장상태가 계속되면 스스로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옛 선비들은 대나무를 즐겨 그렸습니다. 바람에 부러지는 단단함보다는 휘더라고 부러지지 않는 부드러움을 기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나무가 휜다고 나약한 것이 아니듯이 힘을 뺀다고 허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휜 대나무의 완만한 곡선은 오히려 노인의 여유와 탄력입니다. 그것은 맹수가 도약을 위한 낮춤과 움츠림이어서 필요하다면 더 큰 힘을 내기 위한 준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오래 살고 싶으면 모름지기 온몸에 뻗쳐있는 자존심, 권위의식, 집착, 고정관념, 고집, 편견으로 뭉친 힘을 빼서 대나무처럼 유연성을 높여야 할 일입니다. 쓸 데 없는 허세와 과시는 노년의 위엄을 지켜주는 품격이 아니라 에너지 낭비이고, 젊은이와 소통을 가로막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그런 불통의 헛기운을 미련 없이 버렸을 때에 대나무보다 더 유연한 여유와 평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높은 경지는 아니더라도 ‘멍때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머릿속을 텅 비워 멍청한 정신상태, 정신 나간 상태, 아무 생각 없는 멍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얼핏 정신 나간 짓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머릿속을 텅 비워두면 두뇌활동을 활성화하여 오히려 정신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몸 속에 배어있는 유해물질들을 배출시킬 수도 있다고 합니다. 老子는 생각을 많이 할수록 손해라고 했고, 莊子도 아무 생각 없는 멍한 상태가 자연에 동참하는 최고의 경지라고 했습니다. 요즈음 멍때리기 대회도 열린다고 하니 적어도 道家들의 생각이 멍청한 짓은 아닐 것입니다. 젊은이도 그럴진대 기력이 달리는 노인들에게는 더욱 좋을 것입니다. 힘을 빼고, 멍을 때리고 있으면 정신건강에도 좋고, 남들이 일삼아 건드리지 않을 것이고, 건드린다 해도 몸이 유연하여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도가들의 생각입니다. 거북이가 장수하는 이유가 있을 법한 일입니다.
한 때 술자리 건배사로 ‘인생 뭐 있나?’가 유행했는데 인생은 허무한 것이니 술이나 실컷 마시자는 말입니다. 과연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보면 인생이 헛되이 고달프기도 할 것입니다. 더구나 흥겨운 술자리라면 인생살이를 모조리 잊어버리고도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술자리로 인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말처럼 그렇게 허무한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한다면 인생이 정말 허무해집니다. 아무리 늙은이더라도 그래도 아직은 해야 할 본분이 있을 것이고, 설령 멍을 때리더라도 그것은 술 마시고 부리는 허무주의, 향락주의, 이기주의, 패배주의, 자포자기, 자기 비하와는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인생 뭐 있나’ 에는 인간으로서 아무런 소신도, 책임의식도, 다음 세대나 내세에 대한 어떠한 사명의식도 없어 보입니다. 노년을 그렇게 무기력하게 사느니 차라리 ‘말년에 힘쓸 일 있나?’가 적당한 말일 것 같습니다. 노년에는 그럴듯해 보이는 ‘뭐’가 없어도 좋고, 힘을 빼면 더욱 노년다울 것 같습니다.
매사에 힘을 써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젊은이의 방식이지 노인에게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회의 일선에서 물러난 노인이 그렇게 살 필요도 없거니와 그러려면 무리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노년의 힘 빼기는 무기력이 아니고 비겁, 퇴영, 나약, 자포자기는 더구나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 관용, 원만의 원숙한 경지에 가까운 것입니다. 佛家에서 말하는 관조의 경지도 또한 이에서 멀지 않을까 합니다. 늙어지면 노익장을 외치면서 이기려 하지 말고, 얻으려 하지 말고,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 일입니다. 척 값을 치르느라고 노년을 고달프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모름지기 한 발 물러나서, 한 치 높은 눈으로 수수방관하며 멍을 때리면서 마음을 비워 한가하게 두면 몸과 얼굴은 부드러워지고, 부끄러울 일이 적으니 마음 또한 편안하여 養生양생의 지혜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仁者無敵인자무적이라고 했지만 仁者에게도 더 많은 不仁者가 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힘을 뺀 弱者약자를 적으로 삼을 强者강자는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