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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수 Mar 19. 2020

존재의 의미.

존재와 있다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인생은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 것’이고,
그래서 ‘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일 뿐이라고 하는
동영상을 받았다. 

 핸드폰이 좋긴 좋구나- 이런 글을 손쉽게 볼 수 있다니- 아직도 이런 첨단 소통수단에 서투른 자신이 새삼 부끄러웠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에 ‘그냥 사는 건 짐승이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라는 말에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사람과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니? 수도승끼리 하는 선문답이라면 몰라도, 설마 명망 있는 스님이요, 작가요, 인기 강사인 그분이 중생들에게 편지로 그런 말을 했을라고?  아마도 전달자가 왜곡했거나 잘못 해석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런 동영상이 나한테까지 전달된 것을 보면 이미 널리 전파되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게다가 근대철학의 대가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마저 틀렸다고 자신하였고, 삽화에는 더 유명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까지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는 이건 역시 그 스님의 본의가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이런 동영상이 혹시 사람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주지 않을까라는 노파심에서 급히 적는 것이다. 


  그 동영상뿐 아니라 우리는 ‘존재’라는 말을 너무 쉽게 말한다. 가장 흔한 경우가 ‘있다’라는 말을 좀 품위 있게 말하고 싶을 때에 동의어로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평범한 ‘형편’을 일부러 ‘상황’이라고 말하거나 ‘-것’이라는 쉬운 말을 괜히 ‘부분’이라고 말하기 좋아하는 그런 '있는 척'하는 말솜씨일 것 같다. 그런 말들이야 한때 유행어에 불과하지만 ‘존재’라는 말의 오남용은 간과하기 어렵다. ‘있다’라는 말도 쉬운 말이 아니지만 ‘존재’라는 말은 더 어려운 말이다. ‘있다’는 단순히 ‘없다’의 대립어이다. 그냥 감각적으로 보이고, 느껴지고, 들리면 ‘있다’이고 그렇지 않으면 ‘없다’이다. 한자로 말하면 有와 無 정도의 의미이다. 有자의 내력이란 역설적이게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有자에 月이 있는데 이것은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현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에서 나온 글자라고 한다. 도가에서는 有보다는 無를 존중한다. 有와는 다른 개념의 ‘존재’라는 말이 필요했던 것이지 그것은 그저 잘난 척하기 위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동의어로 함부로 혼용하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혼란이 아니라 가치관의 혼란에서 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천 년 전에 나온 <설문해자>에서 풀이한 存在존재의 한자 의미를 보면 단순한 ‘있다’의 개념이 아니라 ‘있는 가치를 묻고 살피다’라는 뜻이 더 있다. 옛날에도 그랬는데 지금 ‘있다’를 그대로 ‘존재’와 동의어로 말하는 것은 언어의 '의미변화'가 아니라 '의미상실'이라고 해야 한다. '상실한 인간의 존재가치를 탐구한 것'이 서양의 실존철학일 것이다. ‘존재’를 그들 말로 말하면 Existence이고, 실존주의 철학은 Existencialism이다. 그것은 단순한 ‘있다’나 有가 아니다. 실존주의를 간단히 말하면 '인간의 존재가치를 실천하고, 삶의 주체가 되자'는 정도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주체가 되는 행동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면 인간일 수 없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한 인간존재 추구의 노력을 조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걸작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Existencialism을 실존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진 ‘존재’를 그저 ‘있다’와 같이 쓴다면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사회의 가치관 타락도 인간의 존재의식을 망각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닐 것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있다’의 의미는 ‘존재’와는 거리가 먼 ‘有’요, 그것도 ‘물질의 소유’ 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적어도 ‘나는 사람이다.’에는 ‘사람이어야 한다.’라는 존재의식이 들어있다. ‘I am a monk’에는 존재의식이 있지만 ‘I have a money’에는 소유의식 밖에 없다. 그런 ‘소유’ 의식 정도는 뼈다귀를 물고 있는 강아지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am’이라고 말하는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Why’라는 물음도 없이 짐승과 같이 ‘어떻게’로 만족한다면 어찌 만물의 영장이요, 자신만이 신의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인간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독선할 수 있겠는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이 무너진 가치관을 되돌리려고 매진을 해도 모자란 판에 인간과 짐승을 같이 보는 이상한 가치관을 전파한다면 작은 문제가 아니다. 모든 생물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수도승의 높은 경지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어리석은 중생들을 제도하는 가치관으로서는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더구나 본질은 제쳐두고 얄팍한 향락주의가 팽배되어 있는 요즈음 세상에 이런 무책임한 내용을 ‘희망의 편지’라고 이름하여 내돌린다면 중생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인간임을 포기해도 좋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본의야 그렇지 않았겠지만 혹시라도 가볍게 인기에 부합하거나 印稅(인세)를 벌기 위해서 그랬다면 자신의 존재의식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唯我獨尊(유아독존)이 설마 짐승과 같아도 된다는 말씀이었을까? 


  ‘어차피 태어났으니 그냥 즐겁게 살자’라는 말이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위안이 될지모르지만 정말 그렇다면 인생이 짐승과 무엇이 다를까 싶다. 윤회설이 맞다면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은 인연일 것이다. 그러나 불가에서도 인간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사람은 다른 생물과는 같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교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존재인식일 것이다. 이 소중한 본분을 제쳐두고 그냥 ‘어떻게 즐겁게 살 것인가’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어른 노릇을 하고,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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