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세상의 소금이고, 이성은 신앙의 소금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물음입니다만 종교에서는 대개 무조건 절대자 神에 의지하고 믿으면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고, 인생은 덧없고 허무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전적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라고 합니다. 과연 무조건 신에게만 의지한다면 인생이 그리 어려울 것도 없고,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영원한 내세가 기다리고 있다면 죽음은 오히려 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다면 구태여 인생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조차 없이 그저 독실한 신앙으로 신에 의지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원시시대로 올라갈수록 그랬고, 지금도 일체의 삶을 신앙에 의지하고,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내세에 대한 종교적 확신을 할 수 없어 인생에 대해서 불안해하고, 조급해합니다. 특히 이번 코로나 사태를 보면서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어리석고 맹목적인가, 그리고 잘못된 신앙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위험하게 할 수 있는지를 절실하게 확인했습니다. 그것은 종교라기보다는 사교집단이고, 사교 사이비 신앙은 제거되어야 할 사회악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정통 신앙이라고 자부하는 종교도 거기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천지로 인한 코로나 대란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데 여전히 대면집회를 고집한다면 신천지와 무엇이 다른지 모를 일입니다. 이번 사건이 이 사회의 소금 역할을 했던 건전한 종교마저 위협한다면 더 큰 손실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성과 감성을 같이 가지고 있는 존재라면 신앙은 이성보다는 아무래도 감성적일 것 같습니다. 감각기관에 의지하는 감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감각기관인 눈과 귀를 막았을 때 더 풍부하고 깊어집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으면 사실과 멀어져 감성은 더욱 활발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신앙을 ‘인간의 상상력의 결과’라고 가정한다면 상상력에만 의존하는 신앙심은 깊을수록 이성과 현실에서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는 신과 내세의 존재를 의심할 여지조차 없습니다. 인간은 오로지 신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내세를 위해서 존재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이것은 감성적인 상상력입니다. 이에 반해서 이성과 물리적인 이치를 따져서 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무신론입니다. 그들은 종교를 나약한 인간의 산물이요, 감성에 치우친 허구라고 단정하지만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신이 존재하느냐의 문제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간혹 그럴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기껏 한계가 분명한 인간의 의지요,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인생을 인간의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신앙은 애초에 필요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신앙은 곧 인간의 이성의 한계를 드러낸 행위요, 인간의 부족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신은 감성이 꾸며낸 허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감성을 배제하고 이성을 고집할수록 감성은 메마르고, 이성은 맑아져 투명한 박제가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세 자체가 수긍되지 않을뿐더러 神도 역시 투명한 박제일 뿐입니다. 감성은 분별력이 없어서 위험하지만 그 대비책으로 내세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은 이성만을 내세워 내세를 버리는 모험을 선택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어렵지만 눈 감고 귀 막고는 살아도, 박제가 되어서는 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인간에게는 이성보다는 아직 감성적인 면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성과 감성은 인간의 기본 속성이기 때문에 둘 중 어느 하나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이성을 부정하고, 무신론은 감성을 멀리하는 것이라서 둘은 공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원초적 감성에서 인간적 이성으로 변해가는 추세에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적 신앙의 영향력이 점점 약해져 가는 인류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심지어는 신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은 이성과 감성 어느 것 하나도 결여될 수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인생론은 그런 전제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성이 배제된 무신론도, 이성이 무시되는 신앙도 인간적이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무신론도, 신앙도 이성과 감성 사이에 공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요, 본질이 아닌가 합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신과의 약속을 어겨 영원한 생명과 낙원을 잃었지만 그 대신에 이성과 사고를 얻었기 때문에 인간일 수 있었습니다. 이성을 얻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에덴동산에서 선과 악에 대한 의식도, 이성적 사고도 없이 감성으로만 살았던 아담과 이브는 짐승과 다름없지 않았을까? 짐승으로서 감성의 행복과 낙원을 누리며 사는 것과 인간으로서 이성을 가지고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죽음을 맞는 것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우리한테는 그럴 기회마저 없으니 부질없는 생각이지만 이왕 인간이 되었으니 감성, 이성과 죽음을 인간의 본질이요, 운명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동산이 없어진 현실에서 종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성보다는 이성을 가지고 종교의 도움을 받는 자세가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차피 인간 스스로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존재라면 그러한 노력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신과의 관계 설정이 원만할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신도 인간과 같은 이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런 방법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종교는 더 위험한 처지에 몰릴지 모릅니다. 종교가 이성을 소홀히 하고 감성적 믿음만 강조할수록 맹신과 미신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나’를 자각한 것은 인간의 자존과 실존을 찾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인간을 고통과 시련에 빠지게 한 양날의 칼입니다. 석가모니가 세상에 태어나서 ‘나를 깨달았다’고 선언했다지만 바로 그때부터 고통과 번민이 시작된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부처가 되었지만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떨쳐낼 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존의식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탱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두터운 신앙으로 오로지 신에게 의지한다면 인간의 자존, 실존이란 원천적으로 존재가치가 없을 것이고, 반대로 내세가 없다면 인간의 자존이란 살아서의 일일 뿐, 죽으면 역시 아무 존재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죽을 때까지 자존을 내세우며 ‘나’에 집착하는 것은 자신의 그림자를 붙잡고 늘어지는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나'를 버리고 절대자에게만 의지한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 없으니 그럴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란 이성과 신앙 사이에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정쩡한 타협이라고 힐난할지 모른지만 이것이 또한 인간의 한계가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에 인간과 신과는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믿음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더구나 이지력이 감퇴하는 노년에 들어서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