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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Dec 26. 2023

거리에서 한국어가 들릴 때


 저는 지금 성탄 연휴를 맞이해서 가족들과 함께 포르투갈에 여행을 와 있습니다. 지난주부터 쭉 여행 중이다 보니 화요 연재일도 하루 놓치고 말았네요. 햇살이 따뜻한 이베리아 반도에서 새해 전날까지 푹 쉬다 돌아갈 예정입니다.


 연말이나 여름휴가 때 부담 없이 주변 국가를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은 유럽살이의 큰 장점이지만 사실 성탄절이 여행을 하기에 좋은 날은 아닙니다. 연말은 저희 가족의 휴가 기간이기도 하지만, 전 유럽 사람들의 휴가 기간이기도 하니까요. 크리스마스 때 유럽을 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대부분의 카페와 식당이 문을 닫는 데다가 박물관이나 미술관도 운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머물던 리스본에서는 심지어 지하철도 성탄절 당일에는 운행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크리스마스 날에는 거리가 무척 한산했습니다.


 한산한 도시의 거리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관광객들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그 거리를 운 관광객 중 한 명이었고요. 그런데 포르투갈이 워낙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여행지여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제가 한국인의 검색 알고리즘에 따라 유독 한국인들에게 인기 있는 지역만 찾아다녀서 그랬던 걸까요? 가뜩이나 현지인은 사라지고 관광객만 남은 거리, 리스본과 포르투의 거리 곳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한국어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가 포르투갈인지, 한국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로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로부터 들리는 한국어. 참 이상하게 한국어는 듣고 싶지 않았는데도 그대로 귀에 들어와서 꽂히더군요.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하면 다행인데 오랜 시간 한 공간에 가깝게 머물러야 할 때. 이를 테면 트램 정류장에서 나란히 줄을 서서 트램을 기다릴 때나, 루이스 1세 다리와 같은 보행로 폭이 좁은 다리를 건너가야 했을 때. 이처럼 여러 사람들이 밀집해서 모여 있는 장소에 있는 순간에는 어쩔 수 없이 주변의 모든 한국어 말소리가 다 들렸습니다. 리스본에서 28번 트램을 기다리는 동안 제 옆에내내 전화 통화하셨던 분. 죄송해요.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거리 유지가 되지 않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대화 내용을 낱낱이 다 듣고 말았습니다.


 오랜 기간 폴란드에서 사는 동안, 거리에서 혹은 식당이나 카페에서 들리는 주변의 대화 소음은 저에게는 단순한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누군가의 대화 소리이지만 백색 소음처럼 아무런 정보를 담고 있지 않았어요. 영어보다도 더 청해가 안 되는 게 폴란드어니까요. 어쩌면 저는 반쪽자리 세상에 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길거리의 간판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에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안내방송 소리나, 미디어 화면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으며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소통하는데, 폴란드에 살면서 폴란드어를 하지 못하는 저는 그저 눈 닫고 귀 닫고 입 닫으며 오랜 시간을 보내왔으니까요.


 바르샤바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한국인 관광객이 방문하는 숫자가 현저히 적습니다. 일단 일 년의 절반 정도는 여행하기에 날씨가 좋지 않고요, (포르투갈에 와 보니 제가 사는 동네의 날씨가 얼마나 혹독한 것이었는지 절로 체감이 되네요.) 전쟁과 약탈로 이렇다 할 유명한 문화재가 남아 있지 않으니 아무래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여행할 만한 매력 요인이 부족한 편이죠. 이런 곳에서 살다 보니 거리에서 한국인을 마주쳐 한국어를 들을 일도 거의 없었거니와, 내가 하고 있는 한국어를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포르투갈에 오니, 제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한국어를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했습니다. 적당히 웅성거리는 외국어의 향연 속에서, 주변 소음에 귀를 닫고 오랫동안 살아오다 보니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를 거리에서 접하는 게 너무나 낯설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다소 피곤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한국어 소음에 대해서도 일일이 신경 쓰지 않은 채 어느 정도 주의집중을 차단하는 능력이 발달했으려나요? 오랜 시간 동안 한국어로 된 말은 제가 참여하는 대화 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 언어였기에, 어디선가 들리는 말소리가 한국어다 싶으면 어느새 귀를 쫑긋거리면서 듣고 있더라고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말이죠.


 포르투갈 거리에서도 한국어가 들린다며 이렇게나 촌스럽게 구는데, 저 나중에 한국 돌아가면 이제 어떡하나요? 인천공항에서부터 여기저기 귀 쫑긋거리며 한국어 듣고 다니는 거 아닐지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몇 년 만에 귀국해서 인천공항 안내방송 듣고 무슨 말인지 100퍼센트 다 이해했다며 감격하던 해외 교민은... 설마 저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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