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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Dec 05. 2023

겨울의 어둠을 마주하는 지혜

  혹시 이런 경험 있으신가요? 여름휴가철에 야경이 멋있다고 소문난 유럽의 어느 도시에 여행을 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어두워지지 않아서' 야경을 보기 어려웠던 경험이요. 저는 대학생 때 배낭여행으로 프랑스 파리에 간 적이 있는데, 그 여행에서 간절히 보길 바랐던 반짝반짝 불빛이 들어오는 에펠탑을 보지 못했어요. 여행 시기는 6월 말에서 7월 초, 일 년 중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 무렵이었습니다. 밤 9시가 되어도 아직 하늘이 파랗고 환해서 야경을 보려면 한참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학생 신분으로 저렴한 숙소를 구하느라 파리 시내가 아닌 외곽 지역에 숙소를 잡았고, 그 숙소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타고 종점 가까운 지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밤의 에펠탑을 보고 나면 지하철이 끊기기 전에 귀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반짝거리는 에펠탑은 나중을 기약하며 떠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체코 프라하의 야경을 볼 때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볼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요, 여름의 유럽은 해가 참 깁니다. 아무래도 한국보다 위도가 높으니까요.


 여름에 해가 이렇게 길다는 것은, 반대로 겨울에는 그만큼 해가 짧아진다는 뜻입니다. 위도 52도의 바르샤바는 백야는 아니어도 여름에는 밤 10시까지 바깥이 훤할 정도로 해가 긴데요, 반대로 겨울에는 해가 급격히 짧아집니다. 날씨 애플리케이션을 켜 보니 오늘의 일몰 시간은 3시 25분이라고 나오네요. 12월 초에 이러니 동지가 가까워질수록 해는 점점 더 짧아지겠죠? 일몰 약 한 시간 전부터 하늘에 어둠이 내리다가, 일몰 시간이 지나면 정말 한밤중처럼 깜깜해집니다.


 저희 집 아이들 학교는 오후 4시쯤에 끝나는데요, 이맘때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학교에 가면 기분이 참 이상해요. 가방을 메고 나오는 아이들은 키가 작고 올망졸망한 초등학생 아이들인데, 자기 몸만큼이나 커다란 가방을 메고 깜깜한 밤중에 나오니까요. 일반 가정집 조명과는 다른, 학교 복도 특유의 백색 형광등을 배경으로 하교하는 아이들을 보면 "아, 이거 익숙한 과거의 풍경인데. 야자시간 끝나고 집에 오던 고등학교 시절 생각난다." 싶기도 합니다.  모습을 보면 약간 아이들이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린 시절부터 밤늦게까지 공부를 시키는 학대 부모가 된 느낌도 들어요. 겨우 오후 4시인데 말이죠. 저희가 처음 바르샤바에 왔을 때 첫째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아직 어른과 같은 시간관념이 없어서 하늘의 색깔을 기준으로 낮과 저녁시간을 구분했기 때문에 어느 날 아이가 혼란스러워하며 묻기도 했어요.


"엄마, 폴란드에서는 왜 밤에 학교에 갔다가 밤에 집에 돌아와요?"


아이들 하교 시간에 찍어본 초등학교 사진입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요. 혹독하게도 이곳은 낮에도 대체로 어둑어둑합니다. 단순히 일몰 시간이 빨라서 어둡기만 한 게 아니라, 겨울에는 어느 시간에든 햇볕 그 자체를 만나기 힘듭니다. 해가 떠 있어야 할 한낮에도 노랗고 쨍한 햇살은 거의 만나볼 수 없어요. 낮 12시는 하루 중 해가 가장 높이 떠 있어야 할 시간인데, 그 시간에도 해는 건물 2층 높이 언저리에서 노을처럼 머물다가 그대로 사라집니다. 이른 아침의 해 뜰 녘 어슴푸레한 상태가 하루 종일 계속된다고 보면 돼요.


 최근에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폴란드에 밖에 없을 것 같은 흥미로운 광경을 보았어요. 맞은편 건물 옥상에 태양광 패널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그 각도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최근 몇 년 간 폴란드는 태양광 발전 패널 설치를 꾸준히 늘려왔는데요, 특히나 작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 영향으로 태양광 발전 패널 설치가 부쩍 늘어났습니다. 저희 앞집, 옆집, 뒷집 모두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있고, 학교나 관공서 같은 공공건물 옥상에도 태양관 패널이 붙어 있는 걸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전해 듣기로는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가정이나 단체를 대상으로 세금 감면과 같은 여러 가지 혜택을 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길 건너편 건물에 새로 설치된 태양광 패널의 각도가 조금 이상했어요. 지붕 자체가 경사져서 비스듬하게 설치된 일반 가정집의 패널은 그렇다 쳐도, 보통 하늘을 향해 패널이 있어야 한다는 게 저의 상식이었는데, 이건 직각으로 세워져 있었거든요.



 으잉? 하는 이상한 마음도 잠시, 태양광 패널이 햇볕을 반사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태양의 입사각이 낮은 북유럽 지역에서는 저게 맞는 각도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이죠. 찾아보니 위도 52도 전후에서는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동지 무렵에는 태양 입사각이 14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요. 이 때문에 유효한 일조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건물이나 큰 나무에 가려 아예 집 안으로 햇볕 자체가 들어오지 못하기도 하죠. 먹구름이 짙은 날의 오후처럼 매일 집 안이 어둑어둑해지니 절로 우울해질 것 같지 않나요?


 네, 우울해집니다. (크흑)


 그래서 폴란드에서 첫 겨울을 보내는 외국인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햇볕 부족으로 인한 우울증'입니다. 계절성 우울증이 말도 못 하게 심각해지는 계절이에요. 특히 햇볕이 풍족했던 지역에서 이사 오시는 분들은 신체 리듬이나 정신 건강이 햇볕 때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을 거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첫 겨울의 타격을 고스란히 입으시는 분들도 있어요. 몇 년 전에는 저도 그랬던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그렇게 혹독한 겨울을 한두 차례 보내고 나니, 이제는 겨울이 오기 전에 몸과 마음을 '겨울 모드'로 준비해놔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습니다.


 겨울이 되면 마음 건강을 지키기 위해 평소보다 두세 배로 부지런해져야 해요. 열심히 운동하고, 따뜻한 차와 커피와 핫초코를 수시로 마시며 울적한 기분을 달래고, 영양 가득한 수프를 끼니마다 챙겨 먹고,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납니다. 집안 가구를 이리저리 옮겨보기도 하고요, 책장 정리를 하거나 사진 정리를 하기도 하고요, 옷장을 뒤져 헌 옷을 리폼하기도 합니다. 왜 사서 고생을 하지? 하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 이런 고생을 하며 몸을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마음이 너덜너덜해져 버려요. '북유럽 인테리어'가 괜히 유명해진 게 아닙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어지는 겨울철에, 조금이라도 아늑하고 포근한 공간에서 마음 건강을 지키기 위한 이곳 사람들의 지혜였던 것이죠. 최근에 바르샤바에 사는 지인의 SNS에서 "폴란드의 겨울에는 추위와 어둠 밖에 없다."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문장을 만났는데요, 이 어둡고 추운 계절에 건강한 집순이가 되려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줘야 합니다.


 그 노력의 결과 덕분이었을까요. 겨울철에도 약간의 마음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자, 첫 겨울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어요. 바로 바르샤바의 겨울밤이 작은 불빛들을 더 예쁘게 만든다는 사실이요. 크리스마스 시즌의 반짝거림은 어두울 때 그 진가가 드러나는 법인 것 같습니다. 어두운 시간이 오래 지속된다는 건 그만큼 반짝거림이 많아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주에는 아이들이 아직 학교에 있을 오후 시간에 집에서 제일 가까운 레스토랑에 잠시 다녀왔는데요, 낮외출인데도 밤외출 같은 무드에 기분이 콩닥콩닥 설레었어요. 세 명의 초등학생을 키우는 엄마 입장에서 밤에 외출을 한다는 건 연례행사만큼이나 어렵고 드문 일인데, 대낮에(?) 외출을 하며 이렇게 손쉽게 밤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니. 이날 창문 밖으로 외부 인테리어 장식이 반짝거리는 모습을 보는데, '겨울의 폴란드는 참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폴란드의 겨울은 늘 그대로였어요. 바뀐 건 바로 제 마음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마음은 그동안 힘든 계절을 거쳐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겨울이 만들어준 강인함'일지도 몰라요. 비로소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매년 11월이 되면 겨울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나기도 하는데요, 올해는 무섭고 두려운 11월을 거쳐 12월이 되었는데도 "어? 생각보다 내 상태가 괜찮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내에 있는 크리스마스 마켓에도 다녀오고, 굴뚝빵 같은 겨울 음식도 즐기면서, 겨울의 소소한 즐거움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오히려 해가 길어지는 춘분쯤에 겨울이 끝나가는 걸 아쉬워할지도 몰라요. (한편으론 설마 그럴까 싶기도 합니다만....)


 김경일 교수의 책, <마음의 지혜>에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환경과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온도와 질감, 천장의 높이, 빛의 밝기, 무겁거나 가벼움을 느끼는 사소한 감각은 뇌의 어느 부분에든 영향을 끼쳐 생각과 기분을 바꾸게 해 주거든요. 별것 아닌 행동이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빛의 밝기와 온도에 좌지우지되는 인간의 이 섬세한 마음을 다루는 지혜는, 어쩌면 혹독한 폴란드의 겨울을 겪어야만 배울 수 있는 지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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