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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Dec 12. 2023

오늘 밤엔 산타가 다녀가신대


 작년 12월 초의 일입니다. 평화롭고 평범한 어느 겨울날 중 하나였는데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의 얼굴흥분으로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들뜬 표정으로 집에 온 아이들은, 집에 오자마자 신발장 안의 부츠와 운동화를 하나하나 뒤집어보며 꼼꼼히 살펴봅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겠어요? 


 "엄마, 오늘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랬는데, 집에 가면 신발 속이나 베개 밑에 산타클로스가 두고 간 선물이 있을 거래!"

 

 그렇게 얘기한 막내는, "누나, 신발엔 아무것도 없어! 베개를 확인하러 가자!" 하고 2층 계단을 전속력으로 뛰어 올라갑니다. 덕분에 아이들은 당황한 엄마 표정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저는 그야말로 '동공지진' 상태였어요. 아, 오늘이 성 니콜라우스 축일이라는 걸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폴란드어로는 지엔 시비엥트 미코와이키(Dzien Sw. mikolajki)라고 부르는 성 니콜라우스의 날. 이 날은 매년 12월 6일로, 일명 '산타클로스가 다녀가는 날'입니다.


 산타클로스는 당연히 크리스마스이브날 밤에 다녀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저는, 폴란드에는 12월 중에 산타가 다녀가는 날이 따로 있다는 걸 알고 엄청 당황했었어요. 폴란드뿐만 아니라 독일이나 발틱 3국 같은 주변 나라들에서도 산타클로스는 이날 밤에 다녀가시는 듯합니다만, 저희는 한국인이니 이 집에 다녀가는 산타는 당연히 한국 산타클로스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저와 100% 일치하는 저의 페르소나) 아니겠어요? 지난 10년간 그 산타의 근무일은 일 년에 딱 하루, 크리스마스이브날 밤밖에 없었는데, 폴란드에 와 보니 추가 근무를 해야 할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늘 챙겨 오던 날이 아니니 까먹고 있다가 날짜가 한참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었어요.


 그래도 아이들이 국제학교를 다니는 데다가, 나라마다 크리스마스에 대한 문화가 조금씩 달라서 그동안은 딱히 성 니콜라우스 축일을 챙기지 않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럴 수가. 이번 겨울에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새로운 정보를 듣고 오고야 말았네요. 이전 담임선생님들은 미국 분이거나 호주 분이셔서 성 니콜라우스 축일을 따로 챙기는 유럽의 문화와 거리가 있었는데, 마침 이번 담임 선생님은 폴란드 분이셨거든요. 선생님, 제게 미리 쪽지라도 한 통 주셨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당황하진 않았을 텐데요, 흑흑. 그러나 한국에서 학부모들에게 동짓날 팥죽 드시라고 가정통신문을 보내지 않듯이, 오늘 산타클로스가 올 거라고 선생님이 미리 알려주실리는 없겠죠. 어쨌거나 당황한 우리 집 산타클로스는 결근(?)해버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수 있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2층 침실로 올라간 사이, 저는 부엌으로 달려가 비밀 찬장을 뒤져봅니다. 여기엔 근무날짜를 예측할 수 없어 아이템을 상시 준비해 놓는 이빨요정의 선물이 숨겨져 있어요. (저희 집에는 여러 신비의 존재들이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막대 사탕 몇 개가 재고가 남아있네요. 사탕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베개 밑을 뒤지고 있을 아이들에게로 갑니다. 남매가 둘 다 막내방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먼저 누나 베개 밑에 사탕을 슬쩍 심어(?) 두고,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막내방으로 들어갑니다. 이미 베개 밑을 한참 뒤져봤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막내가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방문을 나서는데, 그새 동생 선물을 먼저 찾아주다가 포기하고 자기 방으로 옮겨간 둘째가 소리칩니다.


 "야! 진짜 있어! 베개 밑에 사탕이 있어!"


 화들짝 놀란 막내가 누나 방으로 달려가는 사이, 저는 스을쩍 막내 베개 밑에 사탕을 숨겨둡니다. "왜 누나한테만 사탕이 있고 나는 없는 거야?"라고 억울해하는 막내에게 "아니야, 분명 네 베개 밑에도 있을 거야. 다시 한번 잘 찾아볼래?"하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고요. 다시 베개 밑을 뒤져보니 이번에는 너무 쉽게 사탕이 발견되네요. 다행히도 사탕을 만난 기쁨이 너무 커서, 왜 아까는 선물을 찾을 수 없었는지에 대한 의심은 저 멀리 사라졌습니다. 진짜 우리 집에 산타클로스가 다녀간 게 맞았다고, 선생님이 말한 게 진짜였다고 신나서 소리치는 아이들을 보며 저는 결심합니다.


'아... 내년엔 꼭 까먹지 말아야지.'






 그리하여 올해, 폴란드에 온 지 5년 만에 폴란드 산타 '미코와이'는 우리 집에도 12월 6일 밤에 찾아왔습니다. 미코와이는 니콜라스의 폴란드식 이름인데요, 중세 시대의 꽤 흔한 남자 이름이다 보니 산타클로스 외의 유명인들 중에서도 미코와이라는 이름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미코와이 코페르니쿠스가 있고요(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라고 부르면 아마 코페르니쿠스가 섭섭해할 거예요.), 쇼팽의 아버지의 이름도 미코와이 쇼팽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바르샤바에 있는 코페르니쿠스 과학관에 가시면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미코와이와 대화할 수 있습니다. 외면은 코페르니쿠스고요, 내면은 chat GPT 3세대입니다


 성 니콜라우스 축일에는 보통 초콜릿이나 사탕 같은 달콤한 군것질거리들을 선물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트리 앞에 큰 장난감 선물이 배달되는 건 다른 서양국가와 마찬가지로 크리스마스이브날 밤이라고 하네요. "산타클로스가 이미 다녀갔는데 왜 이브날 밤에 또 와요?"라고 폴란드 분에게 여쭤보니, 이브날 밤에 오는 선물은 소원을 들어주는 크리스마스날 밤의 별이 가져다주는 선물이래요. 밤하늘의 별이 선물을 배달해 준다니. 제가 그동안 알고 있던, 아마도 영미문화권의 전설인 것 같은, 루돌프가 끄는 썰매와 빨간 외투의 산타클로스와 달라서 신기했어요. 이쯤 되니 산타클로스의 고향인 북유럽에 '대체 원조는 무엇인가요?'라고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어쨌거나 나라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동유럽의 산타클로스는 성 니콜라우스데이에만 근무하는 것 같아요. 선물도 과자와 초콜릿이라니 산타 입장에선 경제적인 부담이 덜 하겠네요. 19세기까지는 이 날이 국가공휴일이었다고 하는데, 성탄절뿐만 아니라 동방박사가 찾아온 날인 주현절까지 이미 공휴일인 폴란드에서, 성 니콜라우스 축일까지 공휴일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부모님들이 참 싫어했을 것 같아요.


 마트에 가니 산타클로스 모양의 각종 초콜릿이 많이 있었는데, 저는 은박지로만 포장된 초콜릿을 사는 게 좀 꺼려져서 가장 밀봉상태가 훌륭한 킨더조이 초콜릿을 샀습니다. 왜냐하면, 신발 속에 초콜릿을 넣어야 하잖아요. 이거 너무 비위생적인 거 아닌가? 하는 거부감이 살짝 있었는데요, 의외로 큰 장점이 있었습니다. 늘 잠자는 아이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조심조심 베갯머리에 장난감과 사탕을 숨겨 둬야 했던 전, 현직 이빨요정은 근무날 밤만 되면 발걸음 하나하나 조심했어야 했거든요. 그에 비해 신발 속에 무언가를 숨겨두는 건 놀랍도록 간단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날짜만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이 정도 이벤트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더라고요.


 그리하여 올해 12월 6일 날 아침. 학교 가기 전 아이들은 아드번트 캘린더에서 그날의 초콜릿을 꺼내먹는데(아, 정말 설탕이 넘쳐나는 12월입니다.) 그날따라 각자의 박스에서 정말 좋은 아이템이 나왔습니다. "엄마, 오늘 나온 초콜릿은 왜 이렇게 크고 좋아요?"라고 묻는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글쎄, 오늘이 성 니콜라우스 축일이어서 그런가?"하고 답해줍니다. 그 순간 눈이 번쩍, 빛나던 아이들은 오도도독 현관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부츠 한 켤레에 담긴 초콜릿을 발견합니다. 의기양양하게 한 손에 하나씩 초콜릿을 들고 오는 막내의 말이 너무 웃겼어요.


"작년에는 사탕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올해는 초콜릿이 두 개나 있어!"

"머리는 하나고, 발은 두 개여서 그런가 봐!"



 그러나 저희 집에는 신비의 존재 따위는 믿지 않는 열세 살 중학생 소녀도 사는데요, 신발 속에 담긴 초콜릿을 보고 저를 한 번 쓱 쳐다봅니다. 물론 동생들의 동심을 지켜주고 싶은 책임감을 공유하는 K-장녀인 걸 알기에, 그녀가 싼밍아웃을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을 몇 번 깜빡여봅니다. 짓궂은 표정으로 엄마를 쳐다보다가, 두 개의 초콜릿 중 하나는 아빠 신발 속 깊숙이 숨겨두네요. 덕분에 아침에 급하게 출근하던 반려인은 신발을 신다 말고 '으악, 이게 뭐야!'를 외치며 큰 웃음을 주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일명 '산타잔치'라는 것을 하죠. 폴란드 학교에서도 산타클로스 관련 이벤트가 열린다면 보통 성 니콜라우스의 날에 열립니다. 이날 저녁엔 배우자가 일하는 회사에서 임직원 자녀들을 위해 주최한 크리스마스 파티에 다녀왔어요. 산타클로스가 참석한 아이들에게 선물도 나누어주고, 함께 사진도 찍고, 평소 산타클로스에게 궁금했던 건 무엇이든 자유롭게 물어볼 수 있는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는데, 아쉽게도 이 산타클로스는 폴란드어만 할 줄 아는 산타라서 저희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참석한 다른 폴란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데 "핸드폰 번호가 뭐예요?", "몇 살이에요?", "어디에 사세요?" 등등 개인정보에 대한 온갖 질문이 난무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어요.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절로 웃음이 나는 저녁이었습니다.



 한국과 미국, 그리고 폴란드.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저희 집에 찾아오는 산타클로스가 건네는 편지도 한국어에서 영어로, 그리고 폴란드어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 일관성 없는 다개국어 능력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언제까지 우리 집에 찾아오게 될까요? 아이들이 자라나는 만큼 점점 눈치도 빨라지고 의심도 많아지고 있는데, 일 년에 이틀이나 일해야 하는 불쌍한 산타클로스는 슬슬 은퇴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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