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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Nov 28. 2023

5년의 시간이 내게 준 마음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한 때는, 폴란드에 온 지 딱 일 년이 되던 시점이었습니다. 브런치 작가로 승인되기도 전에 서랍 속에 담아놓았던 저의 첫 번째 글은, '폴란드살이 1년 차'의 소회를 풀어놓은 글이었어요.

https://brunch.co.kr/@seluetia/1


 몇 년 사이에 폴란드 생활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이 많이 변했다는 걸 느낍니다.


 어느새 폴란드 바르샤바에 산 지도 만 5년이 지나 6년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5년의 시간. 주재원 가족에게는 좀 이례적으로 긴 시간이에요. 보통 외교관이나 공사에서 파견 오신 분들은 3년, 사기업 주재원들도 4년 혹은 길어봐야 5년 임기를 채우면 대다수 귀임하시는데요, 저희 가족은 어쩌다 보니 남들보다 조금 더 길어진 주재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끔씩 주변에서 물어봅니다. "언제 귀임해요?" 질문하시는 분들이 처음 폴란드에 오셨을 때 저는 이미 폴란드에 몇 년째 살고 있었는데, 그분들은 곧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계시고 저는 아직도 살고 있으니까요. 예전에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마도 올해 겨울이요?" 혹은 "아마도 내년 여름이요?"하고 답하곤 했는데, 그 겨울에도 귀임을 하지 않았고 그 여름에도 귀임을 하지 않은 채로 폴란드 바르샤바에 남아 있으니 어느새 저는 거짓말쟁이 양치기 소녀 아줌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냥 씩,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도 몰라요."

 

 아마 이 단풍을 보는 것이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몰라,라는 마음으로 지난해 가을을 보냈는데, 또다시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올해의 단풍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내년에도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폴란드의 단풍을 보는 거 아니야? 하는 불안감도 스멀스멀 올라왔어요. 그런데 이 마음을 과연 불안감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조차도 내가 과연 어느 도시에서 살고 있을지 예측할 수 없다는 불확실성을 생각할 때 드는 감정은 분명 불안감이 맞지만, 바르샤바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할 때 드는 마음은 오히려 안도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제가 느끼는 이 안도감은 스스로도 너무 신기한 감정입니다. 내가 폴란드에서 더 오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다니.  


 저만 안도감을 느끼는 게 아닌가 봅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예요. 폴란드로 온 첫 해에 아이들이 수시로 물어보던 질문은 "우리 한국에 언제 돌아가요?"였는데, 그때 질문의 이면에는 '빨리 돌아가고 싶어요.'라는 속마음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에서 지나는 시간이 한 해, 두 해, 지날수록 아이들이 질문하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요즘 저희 둘째는 '사랑하는 친구들을 폴란드에 두고서는 절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에, 우리가 사는 이 도시에. 그동안 소중한 것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올해 여름은 갑상선암 수술과 입원으로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개인적으로 많이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래서 저는 '집'에 가고 싶었어요. 우리는 지치고 힘들 때, 피곤하고 마음에 여유가 없어질 때면 '집에 가고 싶다.'라고 생각하잖아요. 귀소 욕구는 우리의 원초적 본능이니까요. 그런데 저는 집에 가고 싶어 졌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폴란드'에 오고 싶었어요. 몸은 정말 내 집이 있는 한국에 있는데 말이지요. 아마도 제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폴란드를 집으로 여기는 자아가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개학을 앞두고 다시 폴란드로 돌아오던 여름에,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길에서 저는 이런 짧은 글을 SNS에 남겼습니다 : 드디어 바르샤바로 돌아가는 길. '드디어'라는 감정이 든다니 신기하다. 폴란드로 돌아갈 때는 늘 한국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한 아름 가지고 갔는데, 이번에는 그런 감정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이들도 "'집'에 가니까 좋아요."라고 말한다. 이제 폴란드 생활이 낯설거나 두렵게 느껴지지 않기에, 그만큼 폴란드가 '내 집'같은 느낌이 든다. 주재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이번에야말로 '여행'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내 살림과 익숙한 풍경이 있는 곳으로의 여행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하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그러게요. 이 감정은 대체 뭘까요. 8월에 그렇게 폴란드로 돌아오고 나서, 입국한 지 딱 이틀 후에 남편이 "빅뉴스가 생겼어."라며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올해에도 귀임 발령이 나지 않았다는 소식. 올해 겨울에는 정말 한국에 돌아갈 줄 알고 미용실도 다녀오지 않고, 식재료도 사 오지 않고, 아이들 치과치료도 미룬 데다가, 겨울 방학에 병원 예약까지 잔뜩 잡아두고 온 저는 순간 혼란스러웠지만, 신기하게도 그 소식을 듣고 내심 기뻤습니다. 바르샤바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다는 게 기쁘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그 신기한 감정의 정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편안한 내 집에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저의 일상은, 제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풍경은, 한국이 아닌 여기 폴란드에 있었으니까요. 어느새 이곳의 삶이 일상이 되고, 한국에서 보냈던 방학이 일상을 벗어난 여행의 시간이 되어 있었습니다.  


 몇 년 사이에 폴란드 생활을 바라보는 저의 마음이, 두렵고 낯설었던 그 마음이 익숙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함께하고 싶은, 그러나 그럴 수 없어서 아쉬운 소중한 장소와 사람들과 추억도 여기에 쌓여있어요. 5년의 시간이 제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살았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자잘한 불편함들이 여전히 생활 도처에서 종종 발견되곤 하지만, 어느새 그 불편함마저 익숙해져서 저의 일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5년 전의 저는 알 수 없었던 신기한 감정이에요.


 문득 이 시점에서 폴란드 생활에 대한 글을 쓰면 지금의 나만 쓸 수 있는 새로운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19년의 글은 4년 전의 내가 쓸 수 있었던 글이기에, 지금 다시 쓰라면 절대 그 감정으로 글을 쓸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5년의 시간이 준 마음으로 새로운 글을 쓴다면. 그건 현재의 나만 남길 수 있는 글이 되지 않을까요?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다른 연재글들도 많아서 새로운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에 대해 망설였는데, 지금이 아니면 쓸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쌓아 놓은 글도 없으면서 덜컥, 폴란드 생활에 대한 글을 새롭게 연재합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제 폴란드 생활의 끝은 분명히 다가오고 있고, 끝에 이르러서야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주재 생활의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 이렇게 생각하니 저도 참 궁금해지는데, 사실 어떤 글들이 이곳에 모일지 아직 모르겠어요.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그 마음을 발굴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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