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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Aug 08. 2020

오늘도 빵을 굽는 하루

아이들에게 숨기고 싶은 엄마의 불안한 마음은 빵 냄새 뒤로 감춘다

창고에 쌓아뒀던 밀가루가 똑 떨어졌다.

지난 5월 경에 지하실에 열 봉지 가량 두둑하게 쌓여있는 걸 보고 한동안 밀가루는 사지 않아도 되겠군, 하고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다섯 식구 입 속으로 홀랑 사라졌나 보다. 거진 석 달 만에 슈퍼마켓에서 새로 밀가루를 샀다. 집에 오는 길에 뽀얗고 하얀 가루가 종이봉투에서 새어 나와 장바구니에 묻었다. 집에 돌아와 장바구니를 비우고, 마당에서 바구니를 툭툭 털어내니 뽀얀 가루가 허공에 연기처럼 퍼졌다.

'아, 이 풍경 진짜 오랜만이다.'

허공에 날아가는 가루를 보며 생각했다.




올해 봄, 나는 거의 매일같이 빵을 구웠다.

바나나 케이크나 당근케이크처럼 그냥 재료를 숭덩숭덩 갈아 넣고 계량을 대충 해도 빵이 완성되어 나오는 원볼 퀵 브레드에서부터, 이스트를 넣고 꼬박 스물네 시간을 저온 숙성해서 혹시라도 제대로 부풀지 않을까 봐 반죽을 아기 엉덩이처럼 섬세하게 토닥거려줘야 했던 사워도우 브레드까지.

빵을 주식으로 먹는 폴란드지만,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스타일의 버터 식빵과 단팥빵, 카스텔라도 구우며 막혀버린 비행기 길과 고국의 그리운 맛도 생각했다.

3월에 있었던 남편 생일, 4월에 있었던 결혼기념일, 5월에 있었던 큰 애의 생일 케이크도, 축하할 일이 있을 때마다 필요했던 케이크를 모두 직접 구웠다.

그랬다. 올해 봄, 우리 집 오븐은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매일 뜨거운 열기를 품어냈다.  


2020년의 봄만큼 우울했던 날들이 있었을까. 외출금지령이 내려 일주일에 한 번씩, 생필품을 사러 나가는 길이 유일한 외출이었고, 공원, 놀이터, 식당... 주변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남편은 사무실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재택근무를 했고, 매일 온라인으로 주어지는 학교 과제에 붙들려 아이도 나도 힘들었던 나날들. 그럴 때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밀가루를 치덕 대며 빵을 구웠다. 빵 굽는 냄새가 집 안에 퍼지는 동안에는 가족들 모두가 그 황홀한 냄새에 마음을 빼앗겨 그간의 근심 걱정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말랑한 반죽을 섞고, 치대고, 혹은 머랭이 꺼질까 봐 아주 섬세하게 주걱을 휘저을 때면 그 순간에만 오롯이 마음을 쓰는 몰입의 경험. 


슬픔은 자신이 무엇을 한다 해도 해결될 수 없다는 절망과 맞닥뜨리면 사람을 부서뜨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그 괴력 앞에서 그나마 날 지탱하게 만들려면 무언가에 몰두해야 했다. 빵 굽는 냄새, 마늘 익는 냄새, 가장 행복한 냄새들로 행복하지 못한 나를 위로해야 했다.


모델 오지영은 그녀의 에세이집 <소소하게 찬란하게>에서 좋아하는 도마에 요리를 하는 장면으로 글을 시작한다. 그녀는 식물인간이 된 엄마를 두고 매일매일 빵을 굽고, 요리를 했다고 한다. 그나마 요리를 하고 있을 때면 엄마에 대해 잠시 생각을 멈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혹은 요리하던 엄마의 마음속에 오히려 깊이 들어가거나. 


폴란드는 연일 일일 확진자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저께 680명, 어제는 726명, 오늘은 809명. 앞자리 숫자가 매일 바뀌면서 확진자가 치솟았다. 아이들의 개학은 다가오고 있었고, 마음은 심란했다. 유럽에 2차 대유행이 온다고 한다. 유럽보다 앞서 개학했던 미국 미시시피주에서는 개학 첫날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왔다. 아이는 학교에 너무 가고 싶지만... 엄마가 왠지 허락을 안 해줄 것 같다며 내 눈치를 본다. 외면할 수 없는 아이의 속마음을 마주했지만 엄마로서 불안한 마음도 무시할 수 없다. 가을학기 신청란에 대면 수업을 클릭해야 할지 온라인 수업을 클릭해야 할지 내 마음마저 갈팡질팡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계량컵에 밀가루를 담고 있었다. 

가끔 연락하며 지내는 이웃 언니에게 점심이라도 먹으러 놀러 오라고 했더니 언니는 오늘 김치를 담그기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파김치, 배추김치, 오이소박이, 오이지... 오랜만에 여름날의 재래시장에 갔다가 파가 너무 좋아 보이길래 스물한 단이나 샀단다. 고개를 돌려보니 또 오이가 너무 좋아 보여서 사고 보니 10킬로가 넘고, 또 배추가 너무 좋아서 사고 보니 그것도 10킬로고. 시장 아주머니가 채소를 계산해주며 You Okay? OK? 를 다섯 번은 물어본 것 같다고 했다. 언니는 스트레스를 이렇게 푸는 것 같다고 말하며, 김치 담그다가 스트레스 더 받을지도 모르겠다고 웃었다.

부엌을 떠나지 않으며 엄마들은 이렇게 스트레스를 푸는 것일까. 

사람 사는 모습이 다 다르지 않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깊은 불안감과 우울감을 내비치지 않으면서도,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갓 구운 빵을 보고 침을 흘리며 달려드는 아이들을 보면서 내 새끼 입에 맛있는 것을 넣어주는, 그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고 수천 년의 시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되어온 엄마의 행복을 느껴본다. 그러면 조금 마음이 나아진다. 아이들이 훗날 어른이 되어 이 혼돈의 시기를 생각했을 때, 달콤한 빵 냄새가 그 기억에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우리 그때 집에서 복작되며 맛있는 빵 많이도 구웠지. 반죽으로 재미있는 모양도 참 많이 만들었지 하면서.


 불안하고 우울했던 마음은 빵 냄새 뒤에 감추고 싶어서, 오늘도 나는 빵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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