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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Sep 02. 2020

와인에 대한 첫 번째 기억

코르크 냄새를 맡은 아이가 떠올린 5년 전의 추억

 지난 토요일 점심이었다. 파스타와 함께 먹을 생각으로, 그리고 남은 건 주말 내내 함께 마실 생각으로 와인 한 병을 땄다. 남편은 능숙한 솜씨로 와인 오프너의 스크루를 코르크에 끼웠다. 뽀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스크루가 코르크에 박히는 모습을, 그리고 까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병에서 퐁, 하고 뽑히는 순간까지, 그 모든 과정을 아이가 옆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아이는 스크루에 박혀 있는 코르크 마개를 보고 이게 뭐냐고 물었고, 우리는 와인 마개로 쓰는 거라며 스크루에서 코르크를 빼내어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코르크 끝은 와인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곳에선 시큼하면서도 기분 좋은 와인 냄새가 풍겼다. 코 끝에 대고 와인 코르크 냄새를 맡던 아이가 말했다  


어? 이 냄새... 내가 다섯 살 땐가 여섯 살 땐가 와인병이 엄청 많이 쌓여있는 커다란 동굴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동굴에서 난 냄새랑 똑같아.



 뭐라고?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나는 아이가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다섯 살이었던 해의 여름방학, 우리는 태어난 지 반년이 채 안 된 둘째를 데리고 무려 6주 동안이나 여행을 떠났다. 그중에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에서 와이너리 투어를 한 적도 있었는데, 사실 와이너리라는 장소의 특성상 아이들을 위한 일정이라기보다는 순수하게 우리 부부를 위한 투어였다. 아이는 조금 지겹다고 칭얼거리기도 하고, 와인 저장고 공기 속에 빈틈없이 가득한 와인 냄새를 맡고 코를 막기도 하고, 포도밭 사이를 누비며 뛰어놀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봄, 아이는 이육사의 시, <청포도>를 읽고 "엄마, 청포도는 실제로 어떻게 열려요?"라고 물었다. 와이너리를 투어 했던 기억은커녕, 그 해 여름에 있었던 여행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포도밭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줬을 때 내가 이런 데를 가본 적이 있었냐고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고, 지겹게 자동차를 오래 탔던 로드 투어의 추억도, 요세미티나 나이아가라 폭포 같은 장엄한 자연경관에 대한 기억도 모두 희미해져 있었다.

 어렸으니까, 아이와 함께 했던 여행의 기억은 이렇게 몇 장의 사진과 나만의 기억으로 남았다. 아쉽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향기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프루스트 현상' 덕분이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작가, 마르셸 프루스트가 어느 겨울날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한 입 베어 문 순간, 어린 시절 숙모가 내어주곤 했던 마들렌의 향기가 떠오르며 머릿속에 고향의 풍경이 펼쳐졌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향기가 기억을 이끌어내는 현상을 '프루스트 현상'이라고 부른다. 와인 냄새를 맡은 아이의 머릿속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아이는 코르크 냄새를 맡으며 그날의 와인 저장고의 차가운 공기, 냄새, 빼곡하게 옆으로 나란히 누워 있던 와인병의 모습과 그날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생생하게 이야기해줬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와 남편도 순식간에 그날의 여행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리고 왠지 울컥,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와인 향기에 서려있는 첫 번째 추억이 나파밸리의 와이너리라니. 이 얼마나 호사스럽고 낭만스러운 기억인가.


 문득, 아이를 키우는 것의 보람이 차고 넘치는 순간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는 어쩌면 어른이 되어 수많은 종류의 와인을 마시고 즐기는 나이가 되어서도 와인에 대한 '첫 기억'으로 다섯 살에 찾아갔던 와이너리를 기억할지도 모른다. 와인이 무엇인지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엄마와 아빠와 그리고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함께 찾아갔던 공간. 앞으로 살면서 평생토록 기억할 첫 번째 추억. 결국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는 살면서 경험한 모든 것을 자신의 기억으로 남겨갈 수는 없겠지만, 이런 아름다운 기억이 더 많이 남을 수 있도록 애쓰는 부모의 마음 아닐까.


 와인 냄새를 맡고 5년 전의 여행을 생생하게 기억해준 아이. 그리고 아이의 기억에 힘입어 나도 그날의 추억을 또 한 번 되새겨보며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 보았다. 아이 덕분에 집, 집 그리고 집뿐인 일상 속에서 잠시 대서양을 건너 캘리포니아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이 날의 기억을 시간을 들여 글로 기록해본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며 경험한 모든 것을 나의 기억으로 남길 수는 없겠지만, 기록으로 남긴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만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은, 예전의 기록을 다시 찾아보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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