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삼 남매는 서로 죽이 잘 맞을 때는 인생 최고의 베프를 만난 것처럼 놀다가 또 서로 마음이 어긋날 때는 피 터지게 싸운다. 사이가 좋을 때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또 싸울 때는 그런 웬수가 따로 없다. 그리고 또 언제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냐는 듯이 금세 화해한다.
마치 부부가 그렇듯이, 그야말로 칼로 물 베기다. 어쩌면 한 지붕 아래에 살아야 하는 가족 간의 싸움이란 늘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언니랑 앞으로 평생 절대 같이 놀지 않을 거야."
"언니에게 복수하겠어. 내가 뼈저린 외로움을 느끼게 해 줄 거야."
아침드라마 여주인공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눈에 한껏 독기를 품고 씩씩대는 둘째. 처음엔 정말로 아이 맘 속에 깊은 '복수심'이 깃든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저런 대사를 치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선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언니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함께 논다. 오히려 그 감정과 대사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저 마음을 어떻게 풀어줘야 하나 절절맸던 엄마만 우스워진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하루에 스무 번씩 반복되다 보면 지치지 않는 그들의 싸움에 이런 대사가 절로 나온다.
뭐 어쩌라는 거야 정말.
지난주 토요일, 나와 남편은 점심 준비를 하다가 별 일 아닌 이슈로, 그러나 당시에는 꽤 심각했던 감정 다툼으로 서로 심하게 싸웠다. 프라이팬에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는 삼겹살을 뒤로한 채, 우리 둘은 서로에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다가 남편은 화가 나서 점심을 안 먹겠다고 2층으로 올라갔다. 아이들은 부엌에서 씩씩대며 분노를 삭이고 있는 나의 눈치를 보는데, 눈치는 있으나 그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한 둘째가 슬그머니 부엌으로 들어와서 묻는다.
"엄마. 아빠랑 싸운 거예요? 왜 그랬어요?"
우리 부부는 평소에 자주 싸우는 편은 아니라서 아이들 앞에서 이렇게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싸우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런데 애들 눈에는 엄마 아빠 사이에 크게 싸울 만한 이슈가 없었다. 엄마 아빠가 저렇게까지 싸우는 거면 분명 그럴만한 엄청난 이유가 있었을 텐데.... 같은 공간에서 부모의 대화를 다 듣고 있던 아이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나도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싸울 만한 엄청난 이유 따윈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아이들도 모를 수밖에.
그런데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싸움의 이유를 물어보는 이유가, 싸운 내 마음이 걱정되어서도 아니고, 나를 위로해주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순수한 호기심이라는 게 눈빛에 서려 있었다. 왜 싸웠는지와 누가 이겼는지가 궁금한 마음. 그 눈빛을 읽는 순간 나는 이성의 끈을 놓고 아이에게 버럭 화를 냈다.
"어!!! 싸웠어!!!! 싸운 거 보면 모르니? 가뜩이나 기분 안 좋은데 싸운 사람 옆에 와서 그렇게 속 긁지 말고 나 좀 혼자 내버려 둘래? 싸울 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싸웠지!"
슬슬 눈치를 보던 아이들은 나의 폭풍 샤우팅에 깨깽하며 놀이방으로 도망갔다. 잠시 뒤 마음이 살짝 가라앉고 나자 괜히 아이에게 화풀이를 했다는 후회가 몰려왔다(엄마의 '욱'엔 늘 후회가 따르는 법이다). 점심 먹으라고 아이들을 부르면서 아까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고 둘째에게 사과했다. 아까는 마음이 많이 안 좋았지만 지금은 엄마가 사과를 해줘서 마음이 이제는 괜찮아... 하고 아이는 나의 사과를 잘 받아줬다.
우리는 그 뒤로 이어진 식사시간의 대화에서 '싸운 사람은 속이 많이 상하고 화가 난 상태일 테니, 위로는 해주되 캐묻지 말자. 그러면 오히려 더 기분이 나빠진다.'라든지 '내가 싸움의 당사자가 아니면 그 사정을 다 알기 어려우니 옆에서 싸움에 참견하지 말자. 화해를 강요하지 말자. 싸움을 해결하는 건 당사자들의 몫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했다. 내가 조금 전 아이에게 바랐던 것이기도 하지만, 되짚어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들에게 전혀 하지 못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사실 싸운 아이들 틈에 가서 "너네 왜 싸웠어. 그게 싸울 이유가 돼? 뭐 그런 거 같고 싸워. 그만 싸우고 화해해."라는 말은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싸울 때마다 매번 그러는 것 같다. 정말 아이들의 싸움을 중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보다는 그 순간의 고성, 급격히 가라앉는 집안 분위기, 아이들의 울음소리, 이런 것들로부터 빨리 도피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마음이 컸다. 그런데 역으로 내가 당해보니까 심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이들을 나무랄 게 아니라 나부터 잘하자고 다짐하며, 그날의 점심 대화를 마무리했다.
싸운 남편이랑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어느 순간 또 그냥 잘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인 일요일 오후, 아이들이 마당에 나가서 놀고 나는 텅 빈 집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남의 편이란 분은 골프 라운딩을 가셨고.) 열어 놓은 창문 틈새로 간간히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집 안에는 클래식 연주곡이 흐르고, 따뜻한 라떼와 좋아하는 책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시간. 24시간 육아 체제에서 드디어 한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왔다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오르는데...
"엄마! 누나들이 싸워요! 엄마가 마당에 나가는 게 좋을 거 같아."
라고 막내가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며 외친다.
그래서 (엄마가 늘 그랬듯이) 누나들한테 엄마가 한 번 가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라는 막내의 말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엄마가 어제 아빠랑 싸웠잖아. 그런데 싸운 당사자들이 아니고 옆에서 다른 사람이 와서 싸움에 참견하니까 마음이 별로 안 좋더라고. 지금 누나들도, 누나들끼리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싸우는데 엄마가 옆에 가서 뭐라고 하면 더 기분이 안 좋지 않을까? 누나들이 직접 와서 우리들의 싸움을 좀 중재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면 모를까. 부탁하지도 않는데 엄마가 나서서 싸움을 말리는 건 아닌 거 같아. 누나들의 문제는 누나들끼리 해결해야지. 우리는 조금 기다려보자."
막내는 전날 점심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 맞다 그랬지. 그렇지만 난 싸우는 누나들 옆에 있는 거는 싫은데... 마당에서 더 놀고는 싶고. 어떡하지? 막내가 갈등했다. 나는 씨익 웃으며 차고 문을 열고 자전거를 꺼내 줬다. 누나들이 옆에서 싸우든 말든 그냥 옆에서 너 하고 싶은 거 해. 자전거 몇 바퀴 타면서 기다려봐. 아마 쪼금만 기다리면 누나들이 더 싸우든, 아니면 화해하든... 뭔가 결말이 나겠지.
막내는 약간은 수긍하며, 그러나 조금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자전거를 끌고 마당으로 나갔다. 엄마의 직무유기를 이대로 용인해도 괜찮은 걸까 하는 눈빛으로.
다행히 이날의 에피소드는 해피엔딩. 막내의 호들갑과는 달리 그녀들의 싸움은 자전거 몇 바퀴는커녕 한 바퀴만에 쉽게 결말이 났다. 역시, 참견이 모든 해법은 아니었다.
내가 절대 마당에 나가기 귀찮아서
지금 집에서 혼자서 여유롭게 즐기던 커피타임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고요를 포기하고 굳이 싸움 한가운데로 몸을 들이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아닌 거다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