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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정현 Dec 07. 2020

크고 작은 누나들


 나는 '딸-딸-아들'의 삼 남매 엄마이다. 그래서 우리 집 막내아들에겐 누나라 호칭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명이 있다. 큰 누나와 작은 누나. 사실 각각 분리해서 '큰 누나' 그리고 '작은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 시스터들인데, 어느 날 말실수로 '크고 작은 누나들'이라고 하나로 뭉뚱그려 부르게 되었다. 다양한 사이즈의 크고 작은 동물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떠오르는 뭔가 옹기종기한 느낌의 단어였다. 그 단어가 주는 오밀조밀함이 마음에 들어 뒤로 나는 가끔씩 아들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 

"네 크고 작은 누나들은 어디 있어?"


 실제로 네 살 터울이 나는 이 크고 작은 누나들은 사이즈 차이도 분명하다. 이미 십 대에 접어든 큰 딸은 내 어깨너머까지 키가 훌쩍 자란 반면, 아직 여섯 살인 작은 딸은 배꼽 언저리에 얼굴을 폭 파묻을 수 있다. 그래서 막내아들도 이 '큰 누나'와 '작은 누나'라는 호칭을 두고 딱히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큰 누나는 정말 크고, 작은 누나는 정말 작으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이 '크다'와 '작다'는 호칭이 그렇게 이상할 수가 없었다. 내게는 외삼촌이 둘 있는데, 모두가 그런 것처럼 나는 '큰 외삼촌'과 '작은 외삼촌'으로 두 분을 구별 지어 불렀다. 그러나 그들의 성장 모습은 알 길이 없고, 이미 장성한 어른 버전의 외삼촌을 처음 접하는 나는 어느 순간 이 호칭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작은 외삼촌은 큰 외삼촌에 비해 그렇게 작지 않은데 왜 작은 외삼촌이지?  


 이 의문은 친가 고모들의 호칭을 정리하면서 풀렸다. 10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지만 장남으로 태어난 나의 아버지. 즉 아버지에게는 위로 여섯 명의 누나가 있고, 아래로 두 명의 여동생이 있다.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이 고모들의 이름과 형제 순위를 외우는 건 정말 어린 시절의 나에게 큰 고비였고,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가끔 헷갈린다. 본가가 대구라 모두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고모들은, 서울 사람인 내가 듣기엔 하나같이 말투가 똑같았고, 심지어 자매들인 만큼 엄청 닮았다. 젊었을 때야 그래도 이목구비의 특성이 좀 더 분명하고 각자 스타일도 달랐으니 구별이 쉬울 수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고모들은 모두 이미 중년에 접어든 여성들이었으니...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딱히 다른 고모들과 사이즈에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큰 고모만 큰 고모다. 작은 작은 고모와 더 작은 고모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후로는 형제 순위에 따라 둘째 고모, 셋째 고모, 넷째 고모, 그리고 다섯째 고모로 이어지다가 제일 작은 고모인 막내 고모만 '막내'라는 특별한 호칭을 획득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서수 형식에 익숙해진 내가 어느 날 '첫째 고모'라는 말로 큰 고모를 부르자 어른들이 호칭을 정정해주었다. 첫째 고모가 아니라 큰 고모라고 불러야 한다고. 크다는 것을 맏이를 뜻한다고. 

어린 시절의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규칙 중 하나를 깨우친 날이었다. 


 가끔 막내와 함께 크고 작은 누나들을 부를 때마다 궁금해진다. 이 아이는 이 호칭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큰 누나가 정말로 사이즈가 커서 큰 누나가 아니라는 걸 아이가 알고 있을까. 어린 시절의 내게 짜릿한 기쁨을 주었던 '유레카'의 순간을 이 아이도 비슷하게 경험하게 되려나? 이런 궁금증을 가지며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의 세계와 언어를 들여다보는 건 늘 항상 설레고 두근거리는 일이다. 


 덧붙이자면, 사실 막내는 큰 누나를 큰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무슨 말이냐면, 아들은 첫째를 항상 '언니'라고 부른다. 처음엔 누나라는 말을 모르는 건가 싶어 '언니'가 아니라 '누나'라고 불러야지, 하고 항상 정정해주었는데, 가만 보니 둘째를 향해서는 꼬박꼬박 누나라고 잘 부른다. 누나라는 말을 몰라서가 아니라, 첫째를 언니라고 부르는 둘째를 따라 하는 것이다. 그 뒤로도 언니라고 부를 때마다 '언니가 아니고 큰 누나'하고 고쳐줬는데, 어느 날 아들이 울먹이며 내게 묻는다.


"엄마, 난 그냥 큰 누나 말고 언니라고 부르는 게 편하고 좋은데 그러면 안돼요?" 


 '큰 누나', '작은 누나'라고 세 글자, 네 글자의 긴 호칭을 부르는 것보다 첫째는 언니, 둘째는 누나. 이렇게 부르면 구별도 딱 되고 훨씬 편하다는 거다. 사실은 남자아이 입에서 언니라는 호칭이 튀어나올 때마다 살짝 거슬리긴 하는데.... 본인이 좋다는데 뭐 어떠냐 싶어서 집에서는 너 좋을 대로 하라고 허락해줬다. 물론 그 뒤로도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들이 아들이 누나를 언니라 부르는 걸 볼 때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한 마디씩 보탠다. 그러면 아들이 누나라는 한국어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는 걸, 큰 누나라는 말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지 좋은 대로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설명해준다. 


 언젠간 아들이 스스로 자기 입에서 나오는 언니라는 단어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날이 오겠지. 그럼 그것 또한 아이의 언어가 한 단계 더 여물어가는 순간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 그것대로 아이의 성장이 기특하면서도 아쉽지 않을까.


 그전까지는, 네 크고 작은 누나들을 네 마음대로 부르는 자유를 만끽하기를. 크고 작고 더 작은, 옹기종기 모여 노는 삼 남매의 사이즈가 그때쯤이면 말도 안 되게 뒤 바뀌어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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