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살아볼 거라 상상한 적 없던 나라에서 살아보기

여기는, 폴란드!

by 주정현

내일이면 남편이 주재 발령을 받은 지 딱 2년이 되는 날이다. 10월의 첫날, 남편은 해외 파견 사임장을 받고 먼저 폴란드로 왔다. 나는 같은 달에 비자를 받아 12월에 따라왔으니, 내가 폴란드에서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이제 갓 2년이 넘은 셈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폴란드 국기가 위아래가 헷갈리고(아래위 색이 반전되면 인도네시아 국기가 된다), 구글 번역기의 도움 없이는 한 줄짜리 폴란드어 그림책도 완독하기 어렵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아 중요한 순간에 혼자서 일을 척척 해결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특히 요즘 같은 코로나 시국에 아프기라도 하면 도움받을 가족이 없다는 생각에 막막해진다. 그래도 이렇게 어버버 한 상태로 벌써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내가 있을 거라 상상한 적 없었던 나라에서 매일 먹고 자고 아이를 키우며 일상을 살아간다. 아직까지도 가끔은 이곳이 '내 집'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그냥 아주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생각난 김에 국기를 한 번 더 공부하고 가보자. 아래가 빨강 아래가 빨강....

처음에 남편에게 '폴란드'라는 나라 이름을 들었을 때, 전혀 어디에 있는 나라인 지 떠오르지 않아 당황했었다. 아이들 놀이방에 있는 지구본을 유럽 방향을 돌렸다. 나는 막연하게 헝가리나 리투아니아처럼 동유럽의 어느 작은 나라를 상상했었는데, 막상 세계 지도를 살펴보다 생각보다 땅덩어리가 너무 커서 놀랐고, 유럽 중심부에 떡 하니 위치해 있어서 더 놀랐다. 바로 옆 나라인 독일은 어디에 있는지 지도를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는데, 독일 못지않게 큰 영토를 가지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이 폴란드라는 나라는 그동안 왜 한 번도 지도에서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었을까. 아니, 어떻게 이렇게 이 나라에 대해 까맣게 모를 수 있었을까. (그게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는데, 훗날 지인들에게 폴란드로 이사 간다고 말하면 열에 한둘은 '핀란드'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다.) 이렇게 단 한 번도 내 인식 속에 깊이 들어온 적 없던 나라에서 내가 살게 된다고 들었을 때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출국까지 남은 준비 기간은 3개월 남짓. 갑자기 하루아침에 모든 일상이 바뀌어버렸다.


서른 살이 넘도록 단 한 번도 살아볼 거라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았던 나라에서 살게 된다니. 그러나 감상에 젖어있을 틈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나라인 만큼 그곳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당장 초등학생인 큰 아이가 다닐 학교부터 정해야 했고, 집을 계약하고, 차를 사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 뒤로 틈만 나면 인터넷 검색창에 '폴란드'라는 세 글자를 입력하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뭐든지 앞서 걸 정하는 성향이 있는 나는 심지어 아직 기저귀를 떼지 못한 20개월 셋째를 위해 폴란드에서 구할 수 있는 기저귀 브랜드까지도 검색해보곤 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럴 시간에 폴란드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게 생산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잠든 밤엔 부지런히 온라인 강의로 폴란드어 기초 강좌도 수강하고, 현지 생활정보를 검색하고,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라 어린 삼 남매를 데리고 가는 만큼 철저하게 준비해서 가야 한다고 잔뜩 긴장해 있었다.


만약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니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고 그저 토닥여주고 싶다.


2년 전 그때는, 아이들도 너무 어렸고 폴란드는 너무 멀었다. 어떻게든 시간이 지나가리라 믿으며 이 악물고 버틴 9시간의 비행. 그렇게 앞으로 내가 살게 될 도시이자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그러나 막상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희뿌옇기만 한 하늘, 왜 유럽에도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던 미세먼지, 그리고 춥고 혹독한 폴란드의 겨울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나라든 겨울은 춥고 긴 기다림의 계절이지만 특히 폴란드의 겨울은 잔인했다. 12월 폴란드의 일몰 시간은 오후 3시. 그마저도 한겨울엔 맑은 날을 찾아볼 수 없이 매일이 흐렸고, 30분 정도 햇살이 비추는 날은 정말 양호한 날씨라 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어두운 집구석에서, 자꾸 깜깜한 오후에 밤잠처럼 잠을 자게 되니 낮잠을 밤잠처럼 자며 아이들은 몇 주가 지나도록 시차 적응을 하지 못했다. 날씨는 춥고, 아이들은 점심만 먹고 나면 밤잠을 자니 가구도 세간도 없는 집에서 핸드폰만 붙들고 지내야 했던 날들이었다. 집 주변에 뭐가 있는지 하루 종일 구글맵을 뒤지며 검색하다가도 짧은 폴란드어와 추운 날씨 때문에 다 포기하고 집에만 있어야 했던 2년 전의 그날들. 나는 어떻게 그 시간을 버텼을까.


나는 이제는 안다. 그 12월이 폴란드의 모든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을. 많이 울었고, 많이 힘들었고, 한국이 정말 많이 그리웠던 순간들이었지만, 이제는 어느새 이 나라의 거의 모든 계절을 겪으며 겨울이 끝난 것을 알리는 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곳의 여름은 얼마나 시원하고 청명한지, 그리고 이곳의 사람들은 이 아름다운 계절을 얼마나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인지.. 이제는 조금 알고 있다. 짧았던 해가 길어졌던 만큼 내 마음도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졌다. 다만 그때의 그 낯설었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있어서 그런가, 다시 하루가 다르게 저녁해가 짧아지는 가을이 오면 마음이 다소 심란해지고 우울해진다. 그래도 작년 가을엔 그 우울함에 허덕이며 또다시 일상이 축 가라앉았던 것 같은데, 이것도 자꾸 하다 보면 나아진다고 올해 가을에는 좀 더 의연하고 씩씩하게 이 계절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폴란드에 살면서 폴란드에서 마주한 일상에 대한 기록을 글로 남겼다. 이곳에서 살게 되는 햇수가 많아질수록, 이곳에서 활동반경이 넓어질수록, 더 보이는 것도 많아지고 글감도 많아졌다. 이제 겨우 예정된 주재 생활의 딱 절반이 지난 지금, 폴란드에 대한 글을 벌써부터 남기는 게 혹시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그러나 2년 전의 오늘을 추억하다 보니 2018년의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었듯이, 2020년의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다는 걸 알았다. 아마 2년 뒤의 내가 쓸 수 있는 글도 있겠지. 그러나 그 몇 년 뒤에는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라는 소회로 여행을 끝낸 여행객만이 쓸 수 있는 여행후기가 남아 있을 것이다. 아주 긴 여행의 한 복판에서, 바로 지금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현재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굳이 미래의 시간을 기다릴 필요는 없으니까.


지금 나의 당면한 목표는 우리 가족 모두 이 먼 나라, 폴란드에서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기(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소망을 마음에 품고, 이곳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작은 행복의 조각들을 글로 엮어본다. 2020년. 결혼한 지 딱 10년째 되는 해. 우리 가족의 현재 위치는, 여기는 폴란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