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언어와 시의 언어는 자연을 어떻게 다르게 보여줄까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흔히 인용되는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사진)의 말이다. 알듯말듯한 이 명제를 이해하는데 주요한 실마리가 담긴 <언어로의 도상에서>(나남)가 처음으로 번역돼 나왔다. 책에는 하이데거가 1950~59년 사이 진행한 여섯 차례의 강연이 담겼다. <존재와 시간>이 하이데거 초기 사유를 대표한다면, 이 책은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저서 중 하나로 꼽힌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이며, 말한다는 것은 인간이 발성기관으로 내면적 정서를 밖으로 표현하는 행위에 불과하다고 여겨져 왔다. 이런 인식은 전통적 형이상학부터 근대 철학까지 이어진다. 이와 달리 하이데거는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언어는 존재의 바탕이라고 봤다. 인간이 언어의 주체이거나, 언어의 주관자라기보다 오히려 언어가 인간의 삶을 지탱해 주는 근본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포함하는 일체만물의 ‘존재’는 정적 속에서 말 없는 소리, 혹은 은은한 울림을 내고 있고 이는 언어를 통해 인간에게 다가온다고 봤다. 인간의 말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존재가 말 없이 들려주는 이 소리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횔덜린, 릴케, 트라클, 게오르게 같은 시인들의 시를 통해 이뤄진다. 하이데거는 시인이야말로 천지만물의 존재들을 시어로 담아내 보여 주는 이들이라고 봤다. 시는 단순히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임의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라는 통찰이다. 언어를 매개로 철학자의 사유와 시인의 시짓기가 통하는 순간이다.
출처 : 황경상, "하이데거 후기 철학의 정수 담긴 ‘언어로의 도상에서’ 최초 번역서", 경향신문, 2012.08.01, https://www.khan.co.kr/article/201207312132305
식물은 광합성이라는 화학반응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 포도당을 만든다. 광합성을 하기 위한 재료는 주변 환경에서 얻는다.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땅 속의 물, 그리고 햇빛이 광합성에 필요한 재료다. 광합성의 결과 배출되는 노폐물이 산소다.
생존을 위해 산소를 마시고 에너지 물질(ATP)를 만들고 이산화탄소를 노폐물로 내뿜는 인간과 정반대의 과정이다. 이렇게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시스템이 바로 지구 생태계를 떠받치는 근본 가운데 하나다.
출처 : 곽노필, "‘식물 광합성’ 사람 쉬는 주말에 64% 더 활발해지는 이유", 한겨레, 2024.06.29, https://www.hani.co.kr/arti/science/science_general/1119586.html#ace04ou
나무들
나무들이 잎을 꺼내고 있다
무언가 말하려는 것처럼
새로 난 싹들이 긴장을 풀고 퍼져 나간다
그 푸르름에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있다
나무들은 다시 태어나는데
우리는 늙기 때문일까? 아니다, 나무들도 죽는다
해마다 새로워 보이는 비결은
나무의 나이테에 적혀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매년 오월이면
있는 힘껏 무성해진 숲은 끊임없이 살랑거린다
작년은 죽었다고 나무들은 말하는 듯하다
새롭게 시작하라고, 새롭게, 새롭게
The Trees
The trees are coming into leaf
Like something almost being said;
The recent buds relax and spread,
Their greenness is a kind of grief.
Is it that they are born again
And we grow old? No, they die too,
Their yearly trick of looking new
Is written down in rings of grain.
Yet still the unresting castles thresh
In fullgrown thickness every May.
Last year is dead, they seem to say,
Begin afresh, afresh, afresh.
“ 소리내어 읽을 때 좋은 시가 있습니다. ”
“ 내게는 이 시가 그렇습니다. ”
“ 잎의 은유로 인생의 순환을 노래한 명시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산문으로 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숨결은 시만이 전할 수 있습니다.
나무들이 잎의 혀로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모든 것은 죽는다고. 모든 어제는 가고 없다고.
그러므로 새롭게 시작하라고 합니다. 언제나 새롭게. ”
출처 : 원종섭, "[원종섭 세계 현대 詩 칼럼]16. 나무들 - 필립 라킨", DWBNEWS, 2022.08.23, https://www.dwbnews.kr/news/articleView.html?idxno=26345
과학은 나무를 광합성 작용을 하는
세포들의 집합으로 설명합니다.
반면 시는 나무를 고독한 사색가로 노래합니다.
과학의 언어가 자연을 분석한다면,
시의 언어는 자연을 느끼게 합니다.
하이데거, "언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했습니다.
과학이 자연의 구조를 보여준다면,
시는 자연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두 언어는 서로를 보완합니다.
둘 다 틀리지 않습니다.
단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드러낼 뿐입니다.
생활 속 실천
오늘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며 과학자의 눈과
시인의 눈으로 동시에 묘사해 보세요.
“이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산소를 배출한다.”
“이 나무는 고요 속에 노래하는 존재다.”
두 언어를 오가다 보면,
자연이 훨씬 더 풍성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더 큰 자아로 살아가기
나의 존재는 ‘나’를 넘어,
이미 세상 전체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