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자연을 파괴하는 도구일까요, 아니면 연결하는 다리일까요?
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시각은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이다. 하이데거 이전에도 여러 사상가들이 현대기술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정밀한 이론적 철학에 근거해서 현대기술이 비인간화를 초래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가 처음이다. <기술에 대한 논구>라는 비교적 짧은 글에서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본질이 “닦달”(Ge-stell)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말의 의미는 현대기술이 존재하는 것들의 특성과 다양한 측면들을 무시하고 그들 각각의 의미를 기술적 맥락에만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기술은 자연에게 에너지와 원자재를 내 놓으라고 강요(닦달)한다. 현대 기술 앞에서 모든 존재자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갖다 쓸 수 있고 대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 버린다. 강물은 수력 댐을 통해 에너지를 공급하는 자원일 뿐이고 울창한 숲은 신문을 만들 종이의 재료일 뿐이다.
옛날의 기술은 그렇지 않았다. 농사를 지을 때 농부들은 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씨가 절로 나서 자라는 것을 잘 돌보는 것이다. 강 위에 다리를 놓는 것은 강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리는 강을 건너기 위해 만들지만 그것은 강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하고, 전에는 익명의 존재였던 강 건너 마을을 이웃으로 드러나게도 한다. 기술은 인간이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맞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하이데거는 기술을 인간의 도구로 보는 인간적, 도구적 정의가 맞기는 하지만 기술의 본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기술은 예술과 더불어 숨겨진 진리가 드러나는 통로, 혹은 존재가 자기 자신을 내 보이는 한 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던 기술이 현대에 와서 닦달의 성격을 가지게 된 연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현대기술과 하이데거 존재철학의 연결점을 보게 된다. 하이데거의 핵심 사상은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다. 그는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이 언제나 존재자, 즉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이었지 동사적 의미에서의 존재, 즉 있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고 비판한다. 플라톤 이래로 서양 형이상학은 신, 인간, 자연을 인간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있는 것”들로만 파악하였다. 그러면서 동사적 “있음”에 대한 관심, 즉 그 존재자가 다른 존재자들과 더불어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점점 약해졌다. 플라톤이 모든 사물의 이데아, 곧 불변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나, 중세의 신학자들이 신의 본성을 물으려 했던 것은 “있음”보다는 “있는 것”에 치중한 대표적인 예이다.
파시즘·나치즘, 인간을 도구화
이러한 태도는 근대에 와서 훨씬 더 심화되었다. 근대의 사상가들은 존재자들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신비롭고 초월적인 질서나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진리가 있음을 부인하고, 이성적인 인간 주체를 절대화했다. 존재자들의 진리를 인간이 밝혀내고, 그 상호연관성과 전체적인 질서까지 인간이 부여한다고 보기 시작한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렇게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한 것의 최종 결과가 바로 현대기술이다. 현대기술의 태도는 씨가 자연적으로 자라는 것을 돌보는 농부보다는 농약을 뿌리고 온도를 포함한 모든 조건을 임의로 조절해서 생산량을 억지로 높이는 식품생산 시스템에 비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기술의 “닦달”이다.
문제는, 이 닦달의 대상이 자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술사회에서는 사람들 역시 부품으로, 에너지의 출처로 전락하고 만다. 기계 부속처럼 인간도 잔뜩 쌓아놓고 필요하면 가져다 사용하고 시간이 지나면 버린다. 근대 이후의 인간은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하지만, 그 지배의 대가는 자기 자신의 철저한 대상화다. 그 결과 현대의 인간은 눈부신 성취 가운데 공허하고 지배를 향한 끊임없는 노력 속에 권태롭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자를 대상화했는데, 결국 주체는 없어지고 지배하려는 의지만 남았다. 존재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은 존재를 망각함으로써 그 특별함을 잃고 말았다.
기술사회의 끊임없는 닦달과 팽창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 닦달이, 존재가 기술시대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에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부품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스탈린주의나 파시즘, 그리고 그가 잠시 몸담았던 나치즘과 현대 시장 자본주의에서 현대기술의 닦달을 본다. 이들은 끊임없는 발전과 지배의 추구 속에 인간이 인간을 비인격적 도구로 취급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도덕률은 하이데거의 눈에는 별로 유용하지 않다. 존재의 드러냄을 망각하고 인간의 주체성만을 강조한 결과가 현대기술이라면, 도덕의 주체로서의 인간에 다시 의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태도는 존재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는 과정을 돌보는 농부처럼 겸손하게 그 드러냄에 참여하는 것이다. 플라톤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존재자들이 스스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태도, 존재자들을 드러나게 하는 빛과도 같은 존재를 사유하려는 노력을 통해 인간은 그 본연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예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깊은 애착은 이러한 생각에 기반한다. 예술을 통해 예술가를 초월하는 진리의 장이 열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출처 : 손화철, "[기술속사상] 현대기술아 제발 ‘닦달’하지 마/손화철", 한겨레, 2019.10.19,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7502.html
수력발전소가 라인 강에 세워졌다(gestellt). 이 수력발전소는 라인 강의 수압을 이용하여 터빈을 돌리고, 터빈의 가동은 기계를 작동시키고, 기계의 작동은 전력을 생산하고(herstellt), [이렇게 생산된] 전력의 공급을 위해 변전소와 전력망이 세워진다(bestellt).(TK, 15)
여기서 ‘세움’은 하이데거가 기술의 특징과 관련하여 사용하는 ‘도발적 요구’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하이데거는 ‘세움’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도발적 성격, 즉 자연에 대한 현대 기술의 폭력성과 강제성을 강조하여 보여 주기 위해– 주지하다시피- ‘Ge-stell(몰아세움, 닦달)’이라는 말을 선택한다. 명사화된 동사로서의 이 게슈텔(Ge-stell)은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수단이나 도구를 의미하지 않는다. 게슈텔은 인간 자신이 오히려 기술에 의해 ‘닦아 세워진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앞에서 언급한 방식으로 자연을 끊임없이 닦아 세우도록 요구받는다.
출처 : 이유택. (2015). 하이데거의 과학 비판. 현대유럽철학연구, 38, 155-183.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적 질문은 실제로 현대 기술의 위험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 그는 「전향 Die Kehre」(이하 Ke로 표기)5)에서 위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위험이 곧 존재 자체인 한에서는 위험은 어디에도 없고 동시에 어디에나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다른 곳에 장소를 갖고 있지 않다. 위험은 그 자체가 곧 모든 현존하는 것의 장소 없는 장소이다. 몰아세움이 본질로서 존재하는 존재의 시대가 곧 위험이다.
Insofern die Gefahr das Sein selber ist, ist sie nirgendwo und überall. Sie hat keinen Ort als etwas anderes zu ihr selber. Sie ist selbst die ortlose Ortschaft alles Anwesens. Die Gefahr ist die Epoche des Seins, wesend als Gestell(Ke 116).
존재의 본질을 탈은폐하는 기술의 치명적인 위험은 총체적인 몰아세움의 잠재적 배타성, 즉 모든 다른 존재 방식을 배제하거나 근절해 버리는 경향에 있다. 다시 말해, 기술의 도전적이고 총체적인 몰아세움은 모든 비기술적인 생산 양식까지, 궁극적으로는 탈은폐 또는 진리의 사건으로 보이는 계시 자체조차 압도하거나 드러나지 못하도록 위협한다.
이처럼 기술은 스스로의 본질을 드러내지 않고 위장한다. 인간은 스스로 기술을 통제하는 양 착각하지만, 기술의 힘은 이미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을 대상화, 부품화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인간마저도 대상화, 부품화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기술을 도구처럼 장악한다고 믿고 자신의 욕망대로 다루려 하는데, 하이데거는 기술이 인간의 의지를 벗어날 가능성이 커질수록 기술을 지배하려는 사람들의 욕구 또한 절박해질 것으로 보았다(FT 19). 근대적 주체의 권력을 향한 의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타자에 대한 무제한적 지배”(이유택 2015, 169)를 꾀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활동은 마침내 기술 발전과 짝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착취하는 행위에 이른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기술의 위장술은 끝내는 인간 스스로를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인간과 기술과의 이상적인 관계맺음은 본질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5) 「전향」은 1961년 「몰아세움 Gestell」이란 강연을 보완, 증보한 것으로 『기술과 전향 Die Technik und die Kehre』(1962)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출처 : 안미현. (2020). 하이데거의 기술철학에 대한 비판적 고찰 - STS와 ANT의 관점에서. 독일언어문학, 89, 73-96.
기술은 종종 자연을 훼손하는 힘으로 비난받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기술은 우리가 지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연결하게 해 줍니다.
위성 사진은 숲의 건강을 알려주고,
스마트폰은 바다 건너 사람들과 대화하게 합니다.
하이데거, "몰아세움, 닦달(Ge-stell)"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의 본질이 “몰아세움, 닦달"(Ge-stell)"이라고 하였습니다.
현대 기술 앞에서 모든 존재자는
필요하면 언제라도 갖다 쓸 수 있고
대체 가능한 부품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기술을 어떤 의식으로 사용하는가입니다.
생활 속 실천
오늘 사용하는 기술 한 가지를 돌아보세요.
그것이 자연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질문해 보세요.
예: 스마트폰 → 숲의 새소리를 녹음해 기록하기.
기술은 곧 연결의 가능성이 됩니다.
기술이 파괴가 될지, 관계가 될지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더 큰 자아로 살아가기
나의 존재는 ‘나’를 넘어,
이미 세상 전체와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