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감정으로 괴롭지 않고, 느낄 때 지치지 않기
본 칼럼은 정서중심치료(Emotion-Focused Therapy)를 기반으로 합니다.
지금까지
"왜 이 감정을 느껴야 하죠?"
감정으로 괴롭지 않고, 느낄 때 지치지 않기
끊임없었던 '나를' 탓했던. 저 질문을 들을 때면, 꽤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가곤 한다. 상담자인 필자에겐 너무도 익숙하다. 저 질문을 하기까지 이 사람은 어떤 순간을 살아왔던 걸까? 저 질문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날카로운 밀쳐냄일까, 상처와 생채기에서 튀어나온 염려일까..?
모든 질문의 답은 바로 얻을 순 없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저 질문엔 아픔이 서려 있다. 더 이상 혹은 이 이상 아프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담겨있다.
어느 누가 괴롭고 싶겠는가? 더 아프고 싶겠는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그에 가까운 순간이 올 것 같거나, 그 느낌에 가까워질 것 같으면 우리는 반응한다. 때론 예민할 수 있고 때론 지쳐서 무뎌져버리기도 한다.
당신의 그 반응은, 많은 부분을 이해하게 도와준다. 당신이 겪어왔을 상황, 사람, 말과 행동. 그리고 연결된 아픔. 괴로움. 그로 인해 수도 없이 지쳤을 마음, 좌절하고 주저앉았을 마음,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거나 툭하고 터져버리는 마음.
'왜'라는 그 질문은 설명을 필요로 할 수 있지만, 지금까지 겪어온 경험이 쉽지 않았고 힘겹기도 했으며 지쳐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 감정만 느끼면 하루 종일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요"
"이제야 겨우 전보다 덜 느끼고 있단 말이에요"
"그 감정을 또 느껴야 한다니! 그러고 싶지 않아요!"
"저는 너무 괴로웠고, 이미 많이 지쳤어요.."
"왜 이 감정을 다시 느껴야 된다는 거죠...?"
감정으로 괴롭지 않고, 느낄 때 지치지 않기.
자신을 탓하지 않을 준비와 연습.
떠나기 위한 도착하기.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고 충분히 경험하지 않은 당신이라면 이 말이 모순적으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사실이니 어렵더라도 나와 함께 잠시만 머물러보자. 조금만, 조금만... 함께 머물러보자.
심리상담은 경험하는 과정이다. 그러니, 잠시여도 좋다. 우리가 잠깐 여기에 함께 머물러 보자.
당신이 그토록 떠나고 싶고 꼴도 보기 싫고 다신 느끼고 싶지 않은 그 괴로움은, 다시 말하면, 그 괴로움에 연결된 감정(정서)에 진정으로 충분히 머물러서 경험할 때 비로소 그 괴로움은 옅어지고 약간씩 헐거워진다. 이전처럼 날카롭고 무겁고 뜨겁고 부들거리는 그런 느낌이 아닌, 약간의 가벼움과 부드러운 떨림으로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여기서 의미하는 머무름은, 괴로운 그 순간을 꾹 참고 붙들고 버티는 것이 아니다. 그건 잘못된 방법이다. 여기서 말하는 방법은 그와 다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그렇다고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심리상담에서 감정을 다루는 시도에도 기겁을 하고 격양된다.
하지만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방법은 그냥 버티기가 아니다. 괴로움을 준다고 여기는,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 그 감정에 조금씩 천천히 가능한 만큼 한 걸음씩 가깝게 걸어가 보는 것이다. 그 과정은 이전처럼 외롭고 처량하지 않으며,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막무가내로 끌고 가는 것이 아닌, 상담자가 함께 그 과정을 옆에서 나누고 버티며 충분한 안정감을 느끼며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지금 진정하기(soothing)를 경험하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을 들어야 하고 지식을 쌓거나 암기하는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는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있고, 그 느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아차린다. 알아차린 그것을 머물러보고, 앞에 있는 상담자에게 나눠도 본다. 그리고 그 경험이 그럴만한 것이라고 허용해 주기도 인정해 준다. 우린 그저 다가가고, 느껴보고, 살펴주고, 이해하고 더 허용해 본다.
겁먹고 주눅 들었을지도 모르는, 혼자서 덜덜 떨며 눈물을 흘리던, 터져 오르는 짜증과 분노에 부글거리던, 수 없이 지치고 주저앉아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당신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부분을 경험하는 것이다.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조금씩 떠날 수 있다.
감정적으로 괴롭다는 표현은 감정이 문제란 의미가 아니다. 고통이 괴로울 뿐 감정은 아무 잘못이 없다. 당신의 정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전에는 그 괴로움을 어찌할지 몰라, 혼자서는 더 이상 그 방법을 방향을 찾지 못해서 지치고 좌절했을 뿐이다. 그 감정 자체는 절대 문제가 아니다.
괴로움과 같이 찾아온 감정을 느끼며 괴로웠기에, 그 미움과 탓을 감정으로 돌렸을 것이다. 너무도 잘 이해한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당신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했을 뿐이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 충분히 안전하게 기대지 못했을 뿐이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더 늦지 않게 감정적으로 평안해진다는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길 바란다. 앞으로는 이전처럼 감정을 탓하며 지치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모순처럼 들리는 그 말이 제대로 충분히 경험한 사람에겐 더 이상 모순이 아니게 된다. 떠나고자 한다면, 도착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곳이 어디라 할지 모른다면 더욱 중요하다. 떠나고 싶은 곳이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알아야 도착할 수 있을 것이고 진정으로 떠날 수 있다.
상담관계가 너무도 중요한 이유. 이토록 세밀하고 민감하고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과정과 연습이 가능하기 위해선, 안전하다고 느끼며 신뢰가 바탕이 된 관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냥 관계가 아니다. 자기 자신조차 믿어지지 않고, 너무도 불안하고 흔들리는 그 순간에 기댈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상담관계는 감정을 마주하고 머무르기 위한 변화 과정에 빠질 수 없다. 때론 가장 중요하기도 하다.
The curious paradox is that when I accept myself just as I am,
then I can change.
흥미로운 모순은, 내가 진정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는 변화한다는 것이다.
Carl Rogers 칼 로저스 (인간중심접근의 창시자)
떠나기 위한 도착하기.
항상 문제를 앞에 두는 사람은 해결로만 몰두되지만,
우선 문제로 보지 않고, 그것을 충분히 알아차리기만 해도 다르게 경험된다.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변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문제라고 평가 판단하고 해결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 자신을 또는 자신의 감정을 문제로 두는 사람은 절대 그것으로부터 평안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애초에 문제라고 부를 수 없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느끼는 감정을 문제라고 본다면, 감정을 느낄 때마다 분개하거나 좌절하고 그런 감정을 억누르거나 터트려 삭제하려고만 한다. 자신을 문제라고 본다면,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계속 안고 살아가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밉고 꼴 보기 싫을까. 하지만 그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니 피할 수도 떼어낼 수도 없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 비난을 이어가며 계속해서 스스로 괴롭힌다. 괴로운 사람도 바로 자기 자신이다.
감정을 해결해야만 하는 문제로 보는 사람, 감정과 안전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휘둘리고 끌려다니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이 두 가지 양상은 절대 평안함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오히려 괴로움을 키우고 상처를 곪게 한다.
1. 엄청 누르거나; "왜 감정을 다시 상기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고통스럽다고!"
2. 빨리 터트리거나; "그냥 빨리 터트려버리면 되는 거지! 그러면 금방 없애버릴 수 있어!"
감정을 빨리, 해결만 하려는 시도는 건강하지 않다. 변화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건 해결도 변화도 아니다. 그저 자기 자신을 더욱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길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문제를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닌 다른 연습이 필요하다.
마주하고, 진정하고, 허용하고, 다가가고, 머무르고, 이해하기.
이 과정은 심지어 #정서중심치료에서 말하는 초기의 과정이다. 이 초반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그다음 더 깊이 있는 작업이 가능해진다. 이 과정을 갖기에는 안전하고 신뢰하는 상담관계를 필요로 한다.
신기한 사실은 많은 내담자와의 작업에서 필자가(내담자 역시) 발견하고 경험한 것이기도 하다. 이 과정만 충분히 경험해도 이전보다 자신의 감정을 대하는 모습과 경험에서 변화가 생겨난다.
감정이 덜 두려워지고, 덜 꺼려지며, 조금 더 머물 수 있게 되고,
이전에 몰랐던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되고, 조급함이 줄어들며,
지지하고 위로하는 말이 올라오며, 조금 더 토닥여 줄 수 있게 된다.
필자와 상담에서 이 과정을 거쳐간 내담자들은 이 외에도 수많은 변화를 말하곤 한다. 정말 신기하기도 하면서 당연한 변화이다. 이 글을 통해 얼마나 많은 이에게 이 경험이 닿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반응한다면... 늦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당신의 감정은 여전히 문제가 아니고, 당신 역시 문제가 아니다.
그저, 그 방법을 그 과정을 경험해 보지 않았고, 그 과정을 함께 나눌 안전하고도 믿을 수 있는 누군가가 아직 없었을 뿐이다. 늦지 않았고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한 약간의 용기와 자신을 돌보고자 하는 진심이면 충분하다.
감정은, 정서는 안전한 관계에서 충분히 느낄 때 변화한다.
나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내가 바라는 부분을 존중해 줄 수 있다면,
변화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곁에 찾아와 있다.
로지 ㅣ 상담심리사 ㅣ Semicolon 심리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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