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울림. 가장 나 다울 수 있는 순간.
본 칼럼은 정서중심치료(Emotion-Focused Therapy)를 기반으로 합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어요. 아니, 그러지 않았어요"
"나의 마음, 감정을 정말 진심으로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요."
"나를 불쌍하게 여기거나, 별거 아니라고 평가하고 무시하거나, 이상하다고 비난하는 건 아닐까요?"
"두려워요. 정말 무서워요. 지금처럼 앞으로도 혼자, 이렇게 홀로 남겨질까 봐요"
관계에서 경험하는 괴로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듣고, 심지어 상담자인 나조차 예전에 느꼈던 감정이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한번 떠올려보길 바란다. 내가 괴로워하거나 고통스러웠다고 느끼는 부분은 정말 온전히 '무엇' what 때문이었을까? 그렇다고만 확신할 수 있을까?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상담에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그동안의 경험을 들어보면 대다수, 아니 (감히) 전부가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필자가 만난 수많은 내담자들의 경험, 그리고 주변에서도 우울, 불안, 정서적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경험은 항상 관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무엇 what 만이 아닌, 누구 who 라는 부분이 정말 중요하다고 여긴다. 특히 변화와 성장, 치유와 안정을 논할 때는 정말 빼놓아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내가 쓴 글을 읽는 당신, 혹은 상담실에 찾아오는 내담자가 만나는 상담자라는 존재, 이 모두가 관계이다.
관계는 누구에게나 공통된다. 그래서 누구나 겪고 누구나 느끼는 것이 있다. 단지 그 경험이 다양하고 특별할 뿐이다. 한 개인에게 깊거나 가까운 존재와의 관계라면 더 깊은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내가 삶에서 중요시하는 부분에 맞닿아 있다면 더욱 큰 파동을 만든다.
오랫동안 불안하고 우울한, 정서적으로 깊은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의 경험을 함께 나누면서 무엇에 받은 상처도 깊지만, 누구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더욱 깊어진다는 것을 매번 알아차린다.
정서적 괴로움(emotional distress)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누구는 그 아픔을 자신에게 돌리고, 타인에게 돌리고, 상황으로 돌린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상처 입은 존재는 바로 '나'이다. 그 사실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경우도 있다. 상처를 입고 괴롭다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괴로운 것이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느끼는 상처와 아픔의 깊이, 모양, 기간 등 모든 부분을 이해하는 과정은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는 그 아픔과 상처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충분한 그 과정을 갖지 않으면 아픔은 다시 찾아온다. 더 강하고 깊게, 예기치 않을 때, 더욱 요동치며 찾아온다.
이미 너무 너덜거리고
매번 한숨이 가득하고
떨리는 두 손은 꼭 쥔 채
관계의 상처는 지금의 관계에서 반복된다. 그 아픔은 사라진 것이 아닌 지금 현재의 관계에서 계속해서 올라온다.
그 괴로움이 연결된 사람을 계속 마주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보통 그 관계는 가까운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부모, 보호자, 형제, 연인, 친구, 동료 등 다 다를 것이다.
상담이론에 따라 접근하고 이해하는 방법이 다르겠지만, 정서중심치료 EFT 에서는 내담자가 보이는 관계의 양상을 분석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을 면밀하게 이해하고 이것이 어떤 정서(반응)와 연결되어 올라오는지 주목한다.
예를 들어 똑같은 우울감, 무기력이라고 표현할지라도 그 사람이 현재 맺고 있는 관계, 혹은 이와 연결된 과거의 경험(기억)은 다르다. 어느 하나 같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정서와 연결된 부분들을 따라 들어간다. 마치 뼈대에 살을 붙이듯 혹은 퍼즐의 조각을 하나씩 채워가듯 말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빠지는 늪이 있는데, 바로 해결 중심적 태도다. 사람들은 어서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한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빨리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그래서 상담에 찾아와서도 수년간 혹은 그 이상으로 경험해서 쌓아온 아픔을 단시간, 몇 번의 회기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상담자에게 요구하고 닦달한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거나 기대와 다르면 홀로 좌절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또는 침묵하며 떠나곤 한다.
그럴 때 깨닫게 되는 건,
"이 사람이 정말로 오랫동안 이 아픔으로 깊이 괴로웠구나.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지금까지 사람들과 지내왔구나. 이 방법이 이 사람이 선택한 방법이었겠구나."
그래서 이 과정에 들어선 때가 가장 어렵다. 그 과정은 자기 자신을, 그리고 상담관계를 붙들며 나아가야 할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조차 붙들지 못하는 경우에는 상담도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없다. 그렇게 상담이 종료된다. (이는 조기 종결이라 부른다.)
하지만, 이 과정을 어렵고 괴롭지만, 상담관계에 의지하며 자기 자신을 다독이며 존중하는 방식으로 머물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남는다. 내가 만나온 변화를 경험하는 내담자는 모두 그러했다. 초기에는 정말 많이 불안하고 걱정하고 흔들린다. 때로는 상담자에게 그 불안을 넘기기도 하고, 서운함을 내보이기도 하며, 두려움 앞에서 주춤거리며 망설이기도 한다. 때론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로 그 앞을 떠나거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게 가장 다른 점이다.
"너무너무 두려워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말해본 적도 없고, 말했다 해도 상대방의 반응을 정말 많이 걱정해요. 때로는 괜찮아라는 말도 믿어지지 않아요. 상대방이 나를 좋지 않게 볼 거 같아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도 속으로는 모르잖아요. 나를 멀리하고 나를 이상하게 보고, 나를 떠날 수 있잖아요."
정서중심치료에서 고통(pain)과 괴로움을 찾아 따라 들어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고통을 혼자서 짊어졌을, 그리고 그 고통에 연결되어 있을 정서, 의미, 자기(self), 필요(need) 등 수많은 부분들이 있다. 그 부분들을 하나하나 평가나 판단 없이, 다그치거나 비난하지 않고 살펴보는 일이 참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누구나 취약해지는 순간이다. 그 취약한 순간에 홀로 버티기 힘들 수 있기에 누군가가(상담자가) 그 곁에서 안전함을 확인하며 함께 한다. 그래서 정서중심치료 EFT 에선 이 가치를 가장 우선시한다. 정서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 이전에는 안전한 상담 관계가 꼭 선행되어야 한다. 인본주의 이론들에서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건 그런 의미이다. 존중, 이해, 진솔함, 일치성, 공감이 중심이 되는 관계에서 우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안전함을 느끼는 건 때로 홀로 버거울 수 있다. 어느 정도 연습과 경험이 누적되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전에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거나 혹은 오히려 누구로부터 큰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더욱 꺼려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당연한 일이다. 부끄러운 일도 이상한 일도 아니다. 정말로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괜찮다.
상담에서 관계란, 홀로 버거운 그 부분을 같이 짊어져보는 것이다. 그 무게가 같을지라도 말이다. 같이 짊어진다고 갑자기 그 무게를 줄어들거나 날아가는 것이 절대 아니다. 힘들면 힘들다, 쉬어가고 싶다, 잠깐 쉴 틈이 필요하다 등 같이 머물러보고 허용해 보면서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아'라는 지점까지 가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최소한의 안정감, 그리고 나의 아픔을 제대로 마주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 이 부분이 가장 말하기도 싫었고, 마주하기도 두려웠던 부분이에요. 그래서 항상 내가 먼저 날을 세우거나 도망갔어요. 적어도 내가 먼저 밀어내면 누군가로부터 내쳐지진 않잖아요. 그건 더 끔찍하거든요.
지금 내가 상담자인 당신에게 이 얘길 한다는 것이 믿기진 않지만, 그래도 말하면서 이 느낌은 참 .. 뭐랄까 되게 이상하면서도 낯설고 신기하면서도 여전히 불안하고 걱정돼요.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느낌을 느껴요.
아, 이 경험이 이상한 게 아니구나. 이해받는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 나는 이 경험이 필요했구나"
진정으로 아픔을 만나면 비로소 시작이다
항상 문제를 앞에 두는 사람은 해결로만 몰두되지만,
우선 문제로 보지 않고, 그것을 충분히 알아차리기만 해도 다르게 경험된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관계다. 사람들은 정말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관계는 '누군가'하고만 맺는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타인과의 관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도 관계이다. 자신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참으로 괴롭다. 왜냐하면 매번 무얼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할 때마다, 다그치거나 비난하고 비아냥대며 존중이란 없고 계속된 과제와 평가만이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경험할 때마다 이를 반겨주긴커녕, 가치를 낮추고 남들과 비교하며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나'와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다.
상담에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경험이 의미 있는 이유도 그렇다. 누군가와 친밀해져 본 사람이라면 바로 이해할 것이다. 누군가와 가깝고 친밀해지고 신뢰를 쌓아간다는 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어떤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어떤 경험을 해왔고 무엇을 향해가는지 등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없이 가까워질 순 없다.
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애정과 존중을 담아 깊이 있고 세밀하게 부드럽고 다정한 경험이다.
내가 상담자인 덕분에 개개인이 보여주는 그 변화의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다. 모두들 저마다의 과정의 길이와 필요한 시간, 그 방법을 시도하고 경험한다. 어느 누구도 절대 같지 않다. 그래서 특별하다.
처음에는 정말 매몰차고 냉랭했던 사람이었지만, 그 변화 과정을 걸어가면서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게 되었으며, 이는 타인에게도 자연스레 퍼져나갔다. 여전히 때로 툴툴거리며 짜증을 내는 때도 있지만, 그때조차도 거기에 감겨 휘몰아치는 것이 아닌, 그 마음을 토닥이며 먼저 들어주고 공간을 내어주며 관계를 맺어간다.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인가.
최근에 그 내담자분의 경험을 나누면서 얼마나 뭉클했는지 모른다. 뭉클해하고 눈가에 맺힌 촉촉함을 그분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외롭고 고독했는지 함께 나눠온 상담자로서 그분의 현재가 얼마나 평안하고 안전한지 이해하기에 그렇다. 얼마나 간절했을까. 얼마나 마음이 놓이겠는가.
지금 그분은 상담자가 묻지 않아도 먼저 표현하곤 한다. 자신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들을 더 이상 모른척하지 않고 마주하며 괴롭다고만 여기던 정서 또한 잦아들기도 하고, 조금은 더 친근하게 느껴가고 있다고.
이 과정은 끝나지 않는 여정이다.
상담이 끝이 나더라도, 계속해서 이어질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전보다 따뜻하고 다정할 것이며 평안할 것이다.
로지 ㅣ 상담심리사 ㅣ Semicolon 심리상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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