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

by 시원

허리통증이 일주일 정도 계속되었다. 평소 허리가 안 좋은 편이라 또 도졌나 싶어 자세를 바르게 하고 똑바로 누워서 잤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 낯선 곳에서 의지할 사람도 없는데 아프면 어쩌란 말이냐. 중병은 아닐까? 밤새 아픈 부위와 통증의 양상과 여러 증상들을 휴대폰 화면에 입력하고, 조각난 정보들을 주워 모아서 읽고 또 읽었다. 어는 것 하나 나를 안심시키는 정보가 없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짜! 집에 가서 아프면 안 되냐.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잠을 설쳤다.


며칠 후에는 급기야 허리 주변이 가려워지더니 빨갛게 기포가 생기기 시작했다. 대상포진 증상이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병원을 탐색했다. 챗지피티와 제미나이를 번갈아 돌리면서 피부과 전문의를 찾았고, 걔들이 시키는 대로 말레이시아 병원예약 앱을 다운로드하여 다음날 바로 예약을 했다. 이 일을 하는 동안 뒤죽박죽된 머릿속을 얼마나 다독였는지 모른다.


"한 번에 하나씩, 천천히, 천천히 하자."


병원 예약을 끝내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그래, 이젠 정해진 시간에 가기만 하면 된다. 의사를 만나고, 증상을 이야기하고, 약을 처방하면 받고, 주사를 처방하면 맞고. 천천히 말하고 잘 안 될 때는 번역기를 돌리자. 그런데, 다음 날 병원에서 메시지가 왔다. 예약한 시간에 의사가 진료를 볼 수 없다고, 빨리 오면 안 되겠냐고. 뭐라고? 그럼 예약창을 막아놨어야지. 또 위기! 진정하자 진정하자! 마음을 진정시키고 지금 당장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한국인이라 이곳이 낯설다, 그러니 병원에 도착해서 어떻게 접수를 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달라고 말했다. 병원 관계자는 접수절차를 상세히 알려주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ok ma'am. no worries."



이런 말에 마음이 다시 안심이 되었다. 그래, 여기도 사람이 살고 있었지. 다시 그 말이 떠올랐다. 병원 측에서 알려준 대로 접수를 마쳤다. 외국인이라서 여권을 제시해야 했지만 절차는 어렵지 않았다. 미리 예약한 피부과 닥터의 진료실에 도착하자 간호사가 웃으며 맞이해 주었다. 기다리라고 하면서 뭐라고 하는 것 같았는데 잘 알아듣지 못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10분 정도 기다렸으려나, 익숙한 말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히잡을 두른 여성이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저는 이 병원의 한국인 통역사 이파라고 합니다"


나는 정말 울뻔했다. 그녀가 구세주 같았다. 내가 통역을 요청했던가? 한국인이라고 하니까 통역이 필요하냐고 묻긴 했던 거 같은데... 어, 어 고맙습니다.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간호사가 진료실로 안내했다.


이파는 한국말이 매우 능숙했다. 의사도 이파의 한국어 실력을 놀아워했다. 이파는 정확하고 친절하게 무엇보다, 내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의사와 나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했다. 처방받은 약을 받고, 진료비를 지불하고, 여행자 보험에 필요한 서류를 챙길 수 있도록 세심하게 도와주었다.


"제가 오늘 무슨 착한 일을 해서 당신을 만났을까요?"


정말로 무슨 신파극에나 나올법한 대사를 읊조리자(진심으로, 정말 진심으로 한 말이다), 이파는 수줍게 웃었다. 약을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는데 한국인 회사에서 5년을 근무하는 동안 한국말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듣기에 이파의 한국어는 5년에 마스터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보답을 해드려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하자 "이미 그 말씀으로 충분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은 외국인이 단순한 훈련으로 습득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니다. 나는 단박에 그녀가 좋아졌다. 내가 처한 상황 때문에 마음이 헤퍼졌다고 해도 상관없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구원자처럼 나타나 이런 말로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흠뻑 마음을 줘도 상관없지 않은가. 이파와 다음 진료 때 보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낡고 아픈 몸을 이끌고 병원을 나서는 데 마음은 들어올 때와 달랐다.


며칠간 마음고생을 해서일까. 모든 사람들이 고마웠다. 병원에 간다니까, 걱정 말라고 너는 건강해 보인다고 너스레를 떨던 그랩 기사도, 친절하게 접수절차를 안내하고 걱정 말라고 메시지를 준 누군가도, 버벅대는 외국인에게 싫은 표정 없이 접수를 도와준 접수대의 직원도, 하나하나 세심하게 주의사항을 일러준 의사도, 그리고 나의 증상을 통역하고 무엇보다 나를 위로해 준 이파. 오늘은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 며칠 만에 푹 잘 수 있겠다.


이곳에도 좋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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