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리를 양보받았다

세계가 공통으로 나를 노인이라고 하는구나

by 시원

어학연수를 핑계로(14화 60대에 어학연수를 간다고 하면,) 쿠알라룸푸르에 온 지 이제 한 달이 되었다. 낯설고 긴장되었던 마음이 누그러들자 현실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생활비가 계산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Grab은 이곳에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앱으로 한국의 카카오 택시와 배달앱을 결합해 놓은 서비스앱이다. 한국의 택시비에 비해면 비교적 저렴한 편이라서 처음에는 이동할 때마다 이용했다. 그런데 슬슬 지출이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교통카드를 구입해 버스와 LRT, MRT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교통카드 하나로 버스와 트랩을 모두 이용할 수 있어서 편리하기도 하고, 교통비도 절약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지인 모드'로 다니는 재미도 생겼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처음에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LRT를 타기도 했다. 나이 들어서 새로운 곳에 오면 종종 이런 실수를 한다. 그러나 이젠 그런 실수를 하는 나를 야단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어설픈 행동을 하는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진다. 잘못 탄 LRT덕에 새로운 곳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길을 잘못 들면 어떠랴. 이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볼 수 없었을 풍경과 마주하게 되는데 말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예상치 못한 경험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리를 양보받은 것이다. 그날은 이 나라의 독립기념일이라서 사람들로 붐볐다. 열차 중간에 서서 비틀거리고 서 있는데 누군가 등을 톡톡 치는 게 느껴졌다. 돌아보니 젊은 아기 엄마가 일어나면서 자리에 앉으라는 몸짓을 했다. 당연히 괜찮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도 다시 자리에 앉지 않고 버텼다. 고맙다, 말하고 자리에 앉자 그녀가 안심한 듯 웃었다. 나도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 짧은 순간 이 도시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먼저 내릴 때 옆에 앉은 꼬마와 그녀에게 '오늘 즐겁게 잘 보내'라는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녀가 수줍게 웃었는데 마음이 따뜻해졌다. 낯선 곳에서 혼자 지내다 보면, 사소한 친절에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녹아내리기도 한다.


"아, 여기에도 사람이 있었지." 안심하게 된다.


<쿠알라룸푸르 미술관에서 찍은 작품. 어떤지 이 작품에 끌리더라니...>



그건 그렇고!

따뜻함과 동시에 깨달은 것이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자리를 양보받는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내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이 동네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는데 극구 사양을 해서 그냥 자리에 앉아서 간 적이 있다. 오늘 자리를 양보받고 생각해 보니, 그 노인의 눈에도 내가 노인이었다는 걸 알겠다. 내가 늙었다는 건 나만 모르고 있었다.


퇴직과 동시에 소위 뿌리 염색을 그만두었다. 염색을 하지 않으면 나는 은발이다. 아직은 염색을 할 나이라고 성화를 하는 친구도 있었으나 때마다 염색을 하는 게 귀찮았다. 일 년 넘게 짧은 흰머리를 고수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 노인으로 비칠 것이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뭔 자신감?).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고 나서야 명실상부하게 노인의 반열에 들어섰구나 하는 게 실감 났다. 이 첫 경험을 한국이 아닌 쿠알라룸푸르에서 하게 되다니. 이젠 세계가 공통으로 나를 노인으로 인정하고 있다. 어학원에서 만난 Diana의 말이 떠오른다.


"머리 염색을 해봐. 그러면 훨씬 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으로 보일 거야"


어쩔까? 염색을 다시 해 볼까?





keyword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