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자

by 시원

집 나오면 개고생이라는 말은 맞다. 모든 게 불편한 생활을 한 달 넘게 하고 있자니, 집 생각이 절로 난다. 젊어서 하는 고생은 사서라도 한다지만, 다 늙어서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 이제 와서 영어를 배워서 뭘 한다고, 이제 와서 낯선 곳에서 혼자 살아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이제 와서 새로운 경험이 나에게 무슨 영화를 안겨다 준다고. '습관성 의미 탐색 증상'이 도지는 것을 보면, 한 달 만에 조금 지쳤는가 보다.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의미를 묻는 건 그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의미 따윈 묻지 말아야 하는데, 그저 just 생각 없이 하던 일을 하면 되는 것인데 말이다.


여기서 지내면서 역시 혼자서 어학연수를 한 딸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많이 외로웠겠다, 넉넉지도 않은 용돈을 쪼개서 사느라 힘들었겠다, 먹고 싶은 것 하나를 먹기 위해서 이것저것 얼마나 많은 것을 재고 또 계산을 했을까, 여기저기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건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때마다 돈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부모도 자식 입장이 되어봐야 자식 맘을 아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의 경험이 딸의 어떤 시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런 의미가 있다.


어학원의 학생들도 그리 넉넉하게 지내는 것 같지는 않다. 일본에서 온 이십 대 젊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침대 하나와 화장실이 있는 아주 작은 호스텔에 머물고 있는데 체류비를 아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웃었다. 부끄러워하거나 창피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그럴 일도 아니지만). 안전하냐고 물었더니, That's ok!


그녀가 부러웠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젊음이 부러웠다(결국, 이런 말을 하게 되는구나). 나는 그녀처럼 용감할 수가 없다. 숙소는 청결해야 하고, 무엇보다 안전해야 하며, 길거리 음식은 위생상 먹을 수가 없다. 까탈스러워서가 아니라 겁이 많아서 그렇다. 세월은 야금야금 나에게서 용기와 대범함과 여유 같은 것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안락함에 대한 욕망을 심었다. 한 번 여기에 맛을 들이면, 선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진다. 두렵고, 불편하고, 무섭고, 무엇보다 내가 구획하지 않은 영역으로 나를 내던질 자신이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길 오겠다고 결정한 처음의 내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분명 낯선 곳, 낯선 삶에 대한 열망이었다. 젊었을 때 충분히 할 수 있었으나 하지 못했던 것들, 열망했으나 살지 못했던 삶에 대한 회한이 작용도 했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나는 내 삶의 조건들을 차마 떨치고 일어설 용기가 부족했다. 내 욕망을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섰을 때 누군가 겪게 될 부담과 어려움, 원망과 시기와 질투 같은 사소한 것들을 외면할 용기가 없었다. 가족들의 마음 같은 것들. 그러나 내가 지금 딸에게 느끼는 마음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보다 나는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 대가로 나는 이제 와서 영어를 배우고, 이제 와서 낯선 곳에서 혼자 살아보며, 이제 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겠다고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또다시 그런 것들이 나에게 무슨 영화를 안겨 주겠냐며 투덜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며 이런저런 핑계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젊었던 그때처럼, 젊었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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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자, 얘야. 다시 젊어질 수는 없겠지만, 이제라도 안 해 본 것들을 해보는 게 어디냐? 이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죽어있던 용기도 생기고, 사라졌던 대범함과 여유도 조금은 생길지 모른다. 그럼 거기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되지 않겠냐. 그러니 의미를 찾는다는 핑계로 두려움을 가장하지 말고 그냥 just, 남은 시간을 잘 지내보자. '나는 왜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을 못했을까', 그런 자책과 후회를 칠십에 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니? 그렇지 않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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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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