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디자이너 이재헌 자기소개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재미있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 디자인을 좋아해서 생각하기를 즐기고, 망상에 빠져있을 때도 많다. 디자인을 배우며 문학과 음악 등의 문화를 즐기는 것이 재밌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여러 시각적 경험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중에서 독서는 대학에서 공부를 하며 정말 많이 배우고 즐기게 된 취미이다. 책을 읽다 보니 덩달아 나의 주변을 글로 써보기 시작했고, 지금은 글쓰기가 대표적인 취미이자 특기가 되었다. 디자이너로서의 꿈이 많고, 멋진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다.
어떤 일을 했는가?
2018년 1월부터 외국계 컴퓨터 회사의 한국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그 회사에서 생산되는 컴퓨터, 노트북, 메인보드, 그래픽카드 등의 상품 상세정보 페이지(웹상에서 쉽게 스크롤을 내리면서 상품의 장점에 대해서 설명하는 JPEG)를 만들거나, 그 상품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이벤트, 기획전을 알리는 랜딩페이지와 그에 따른 배너들을 만들었다. 이 두 가지가 내가 이곳에서 하는 대표적인 일이다. 분기별로 오프라인 팬미팅 행사도 치러지곤 하는데, 그때는 인쇄물과 현수막 디자인도 하곤 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재미있는, 도전적인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일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곳에서 나의 미래를 맡긴 채로 계속 일하든지, 빨리 이곳을 나와 내가 원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전공으로 해서 취직을 했는데 하는 일은 막상 디지털 이미지나 영상을 주로 다뤄야 했고...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 많았다. 하고 싶은 디자인을 못하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그런 귀찮고 정 떨어지는 이유들도 있었다. 정말 더러워서 못 다니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아주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 듯, 회사에 대한 아쉬움이 쌓여갔다. 이럴 바엔 애초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는 많이 다른 일을 하는 곳이었다. 장기적으로 내 커리어를 쌓고 싶은 방향으로 갈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이직을 고려하는 중이다.
나는 어떤 학생이었나?
진로를 정확히 어떤 쪽으로 갈지 미처 정하지 못한 디자인학과 학생이었다. 2011년 국립 한경대학교에 입학을 했고, 1학년을 게임 원화가가 되고 싶어서 방황하다가, 12년도, 13년도에는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때쯤, 'GRAPHIC' 잡지와 같은 매체들에 굉장히 감명을 받았더랬다. 학교에서 잠시 수업을 맡은 신동혁 디자이너에게도 큰 영향을 받았다.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때 디자인이 재미있는 것이구나 라는 걸 느꼈다. 그 경험을 시작으로 월간 'CA'라던가... '타이포그래피 서울'이라던가... 어느새 그런 곳에서 나의 작업이 실리는, 나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오는 뭐 그런 꿈을 꾸고 있더라. 그땐 멋진 작업을 하고 싶었는지, 그냥 인기를 얻고 싶었는지...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녔던 학교에 김나무 교수님이 계셨다. 2014년 여름에 방학 때 본인이 운영하시던 디자인 스튜디오 골든트리에서의 학생 인턴쉽에 나를 써주셨다. 내가 주로 맡아했던 일은 한경대학교에서 발행하는 그해의 다음 해 학교 달력을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달력에 들어가는 12장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학과의 친분이 있던 학생들과 나눠 작업했고, 전체적인 편집디자인은 김나무 교수님의 감독하에 내가 진행했다.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어린 디자인 학도였던 나에게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을 많이 깨 주셨다. 밤을 새워가며, 박봉에 시달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직접 체험을 할 수 있게도 해주시고... 디자인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중요하게 진행해야 할 것이 바로 'Research', 디자인해야 할 대상에 대한 공부라고 하셨던 분이었다. 디자인을 즐겁게, 오래, 멋지게 하려면 디자인 자체의 본질에 항상 집중해야 한다고 하셨다. 옆자리에서 달력을 디자인하며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그분의 옆에서 디자인을 하며 보고 배우고 했던 과정들이 값진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동시에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가?
맞다. 너무 과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가 있기도 하다. 이야기를 많이 듣다 보면 나라는 사람과는 다른 부분도 많이 느끼던 참이었다. 때문에 나라는 디자이너 고유한 길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최근엔 많이 한다. 멘토가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진정성은 결국 각자에게 다 다른 의미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곳의 인턴 이후, 15년도 이후부터는 어땠는지?
인턴을 했던 2014년은 사정이 생겨 1년 동안의 일반 휴학을 한 상태였고, 이후 2015년부터 병역으로 2년간 군 휴학을 했다. 사회복무요원(공익)으로 15년 2월부터 17년 2월까지 근무하면서, 남는 시간에 디자인 작업을 꾸준히 했다. 어디서 일을 의뢰받아 작업을 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 작업 메이트들과 서로 자극을 받으며 개인작업을 꾸준히 했다. 누군가는 가설뿐인 헛발질은 공허하다고 했지만, 다른 이가 던져준 주제에 나의 일부를 첨가하여 디자인으로 도출해내는 작업은 그래도 얻는 것이 전혀 없진 않았다. 재미있었다. 그때 했던 작업들을 통해 2016년에는 'ADAA(Adobe Design Achievement Awards)'에서 세미파이널리스트를 수상하기도 하고, '에콰도르 포스터 비엔날레', '골든 비 그래픽 디자인 비엔날레 모스크바' 등에서 포스터가 Selected 되어 본전시에 걸리기도 했다.
겨우겨우 그런 눈에 보이는 성취를 이루었을 때, 벅차오르는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전까지 디자인을 하면서도, 뭔가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디자인을 좋아하고, 잘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러기가 힘들 때가 많았으니까. 이 작지만 나에게는 큰 수상들이 나에게 참 큰 메시지로 다가왔다. 어느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나니, 나라는 사람이 디자이너로서 조금 단단해지게 되었다. 그래도 나 좀 한다 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것 자체만으로도 많이 행복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2017년에 복학을 하고, 바로 졸업전시회를 치렀다.
4학년으로 복학을 했다. 3년 동안 휴학을 하고 복학을 하고 보니 내가 아는 사람은 거의 다 없더라. 주어진 시간은 또 1년밖에 되지 않아서 아쉬웠다. 게다가 4학년에 졸업전시회를 잘 치러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조금 있었다. 그때 김나무 교수님 수업을 들으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놓쳤었고... 그래도 의외로 마음이 편안했다. 앞서 말한 여러 가지 경험들과 작은 성취들로 인해 조금 자신만만했던 것 같다.
행복한 한 해였다. 시각 프로젝트의 지도교수님이 예상하지 못했던 이경석 교수님이셨는데, 의외로 나의 성향을 잘 파악해주셔서 최대한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었다. 출판 창업 프로젝트의 하주현 교수님도 나의 흥미와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 주셔서 정말 유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졸업전시회에서 학과에서 주는 우수상을 받았다. 3년 만의 복학이라 조금 외로운 것도 없잖아 있었지만, 그 해의 졸업 동기들도 참 좋은 친구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참 힘들고 어려운 졸업전시회인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그저 학교라는 곳에서 마지막 디자인 프로젝트를 하고 배우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기에, 아직까지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 회사의 실무 디자이너로서 1년 동안의 경험은 어떠하였는가?
포토샵 실력이 정말 많이 늘었다. 학생 때는 그래픽은 일러스트레이터로 만들고, 편집 레이아웃은 인디자인을 썼다. 포토샵은 사진의 보정이나 누끼를 딸 때 많이 썼는데, 회사에서는 웹상에 올라가는 JPEG가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과정의 작업들을 포토샵으로 써야 했다. 주어진 사이즈의 화면 안에서 제품의 사진을 어떻게 쓸지, 어떻게 자를지 그리고 어떤 분위기의 서체로 어떻게 컴포지션을 만들지 1년 동안 인이 박힐 정도로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있는 소스를 어떻게 잘 쓰고 활용할지도 많이 배웠다. 회사에서 이미지 스톡 업체와 계약을 맺어 놓은 것이 있어서, 그쪽에서 제공하는 이미지 소스들을 디자인에 많이 응용할 수 있었다. 나라는 디자이너가 성장하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겠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했지만, 이런 수단이 있고, 어떻게 쓰는 건지 알아 놓는 것도 절대 나쁜 경험이 아니었다.
나에게 디자인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
1년 동안 내가 원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다른 의미의 디자이너로 일했기 때문에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나는 일단 내가 작업하는 동안, 결과물을 완성시킨 순간이 즐거워야 하며, 그 순간마다 내가 온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전에는 나의 소명(Vocation)으로 많이 생각했는데, 그런 방식으로 디자인을 대했더니 디자인을 하는 내가 버티기 힘들 때가 많더라. 이때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체인 나라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디자인을 못하는 나이더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회사에서 창의적이지 못하고 재미없는 디자인을 하는 나지만, 지금 하는 디자인들에게 거리를 두고 나를 대입하지 않게 되자 더 이상 디자인 때문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것 못하는 나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나라는 디자이너도 행복에 꽤 많이 다가간 것 같다. 이때 디자인이든, 인간관계든, 적당한 거리두기를 해야, 온전한 나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별난 사람이라도 일단 내가 보기에 즐겁고 좋은 디자인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추구하고 싶다. 그만큼 주체인 내가 흔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디자인을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다면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앞서 말한 말을 변형하여 '내가 느끼기에 좋은 디자인이어야 한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너무 궤변일 것 같다. 좋은 디자인은 물론 보고 겪는 내가 좋다고 느껴야 하기도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면, 한 사람이라도 나의 디자인을 접하고 감동을 느낀다면, 또 그래서 조금이나마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성공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공리주의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떤 매체에 깃든 디자인이든 간에, 그것에서 누군가의 긍정적인 의도가 적게라도 사람들에게 느껴지고 그것이 편리하다면 그게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그러려면 적용된 디자인이 쉽고 명쾌해야 할 것이다. 부연설명이 많이 필요 없고, 쉬우면서도 심미적으로 아름다운 디자인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편이다. 실상 나는 디자인에 녹아있는 스토리를 듣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