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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꿀 May 16. 2018

우울

한 번씩 찾아오곤 하는 나의 우울.

오늘. 딱 출근할 때쯤만. 그때만 조금 개어있다가 회사에 도착할 즈음부터 비가 왕창 쏟아졌나 보다. 


점심 먹을 때쯤엔 우르르쾅쾅하는 소리가 몇 번 났다. 얼핏 비 온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았는데, 정말 심하게 오는구나 싶었다. 대충 짐작만 할 뿐이다. 내 자리엔, 우리 회사엔 창문 밖 보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니...


입사한 지 5개월이 돼가고,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지고, 적응해 나갈 즈음이다. 이때 밖에 안돼서 불평불만에, 우울함을 토로하는 내 모습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오늘은 왠지 그대로 있다간 또 우울의 순환에 갇혀버릴까 봐... 뭐라도 남겨서 머릿속을 덜어내면 좀 나을까 싶어 글 쓸 공간을 찾는다. 





학창 시절과 입시미술을 배울 때쯤으로 기억한다. 우울의 시작 말이다. 구차하게 여러 말할 필요 없이, 그리고 나의 자존심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그때 나는 아주 고립되어 있었다. 주변에선 너의 문제가 뭐길래 그렇게 발악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저 지나갈 뿐이었고, 그냥 나는 그 자리에서 우물쭈물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뿐이었다. 악재는 겹쳤다. 항상 그렇듯 말이다. 미대를 지망했던 나에게 그림은 아주 큰 장애물이 되어있었다. 1학년 때부터 근본 없이 그저 '난 잘하니까'라는 생각으로 무시하던 그림의 기본과 기초가 엉망이었던 나는 입시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여지없이 처참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들과의 격차는 따라잡을 수 없어 보였고, 결국 그해 입시는 가나다군 모두 낙방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재수. 재수를 하는 동안에도 저 두 가지의 문제는 나를 집어삼킨 채로 해결되지 않았고, 상황은 절대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땐 그랬다. 이후에 지금 대학교로 진학을 하고, 여전히 불만은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끝없이 추락한다고 느꼈던 그 순간들에게서 벗어나 이곳에 있다. 내가 원하고 하고 싶은 일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았고,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아직 조금 힘겨울 때가 있지만, 확실히 나아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영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여기서 행복한 엔딩으로 끝나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삶이란 그렇게 깔끔하지가 않다. 그저 담담하게 쭈욱 진행될 뿐이다. 그 묵묵함에서 공포를 느낄 정도로 삶의 진행은, 시간의 흐름은 꾸준히 나아갈 뿐이다. 그것의 방향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울함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 방향은 아무 상관도 없다는 사실에서 너무나 큰 상실감과 슬픔, 두려움을 느낀다. 나라는 주체가 언제든 원하지 않은 사건들로 인해 영향받을 것이란 사실. 어쩌면 지나왔던 그 역경들 보다 훨씬 큰 무언가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그리고 또 고통받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명확하고 확실한 불확실성 때문에 말이다. 우울에 빠진 사람들에게 삶 자체는 그들에게서 많이 멀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찾아오는 불행과 슬픔들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람의 정신적인 문제는 그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서부터가 중요한 법인 것 같다. 이미 어떤 트위터 내용을 캡처한 짤방으로도 돌아다니듯이, 우울한 사람에게는 이미 반복해서 빠지는 우울이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과, 충분한 수면, 되도록 삼시세끼 모두 챙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그러한 기본 요구사항들을 항상 충족시키기가 정말 어려운 직업이다. 야근을 하면 잠이 모자라게 되고, 여러 가지 일에 치이다 보면 끼니도 불규칙하게 때우는 일이 많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사회에 나가 소모품처럼 쓰이다가 몇 년 만에 휴직/이직/은퇴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없던 병이 안 생기면 용할 정도.


이런 디자이너 직장의 사례를 인턴, 알바 등으로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큰 우울을 겪었던 나는 직장을 고를 때 정말 신중했다. 그러던 와중에 취직하게 된 나의 첫 직장은 꽤나 좋은 곳이었다. 집에서 먼 거리 이긴 했지만, 어느 정도 확실히 규칙적인 워라밸을 제공했고, 급여도 디자이너의 초봉치곤 꽤 많이 주는 곳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이라면 IT 제조업을 하는 회사의 인하우스 디자이너로 취직한 것이라, 디자이너가 만족할만한, 재밌는 디자인과는 거리가 많이 먼 게 조금 걸렸다. 그리고 꾸역꾸역 해나가는지 5개월 째다. 


주변에 괴롭히는 사람이 없고, 급여가 적어서 허덕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우울할 때가 있다. 원하는 멋진 작업은 할 수가 없어서. 그리고 이것이 배부른 고민이라 바깥에 표현하기 껄끄럽게 느껴질 때 또(!) 우울하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조금씩은 우울함을 갖고 살아가는 것 같아서, 조금은 공감이 될까 싶어 오늘 참 우울한 김에 이런 푸념들을 늘어놓아 보았다. 디자이너들 뿐만 아니라 사회에 막 뛰어든 취업준비생/사회초년생들의 마음들 중에서 이런 순간들이 많지 않을까 싶다. 내가 잘 가고 있는 건지. 원래 이런 건지. 원하던 것보다 성에 차지 않아서. 내가 원하던 게 이런 게 맞는지!


비는 미친 듯 와서 날씨는 끈적끈적하고, 직장은 무난한데 내 포부는 무한하고... 괜히 다른데 눈가고. 뭐가 뭔지 모르겠고 이유 없이 답답하고. 


그래서 오늘은 퇴근을 하다 말고 짬뽕 한 그릇에 소주 한잔 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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